말이 씨가 된다.(2)

인생1./ Naked Life1. 2007/08/28 10:14




2. 말이 씨가 된다.(2)



4


다른 집의 자식들 학교얘기만 나오면 주눅 들어 했었던 아버님은 막내 자식의 성대 입학사건으로 인해서 지난날의 뼈아픈 과거를 어느 정도는 씻고, 아버님의 친구 분들에게 자랑스럽게 술대접을 할 수 있었다. 82년 봄, 집 앞에 있는 성대 조경학과에 입학할 때가 파란 많은 내 생애에 있어 아버님께 최고로 효도한 시기였다.


동네의 훨씬 윗 연배 1?2명이 서울의 명문대에 입학 했던 적은 있었어도, 나와 비슷한 연배 중에서는 성대보다 높은 레벨의 대학에 입학한 적도 없었고, 성대에 합격한 적도 없었다. 이 공백기를 깨고 내가 성대에 입학을 한 것이다.


학력고사 보는 날 아침에는 밥상 앞에서 아버지한테 “누가 너 보고 쥐약 쳐 먹으랬냐... 남의 집 자식들은 벌써 대학생인데, 너는 인제 시험이나....”라는 말 때문에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이웃마을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시험장까지 갔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집에서 “우리 집 새끼는 돌대가린가! 남의 집 자식은 삼수는커녕 고등학교도 못 마쳤어도 성대를 가는데, 우리 집 새끼는....”하면서 자기 자식들을 기죽이는 상황으로 역전 되었다.





5



끊겼던 희망, 아니면 1%의 가능성도 없는 가운데서 이뤄낸 삶?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기적’이나 ‘구원’이라고 부른다.


이 신학용어나 신학사상을 내 삶과 결부시켜보면, 쥐약 먹고 2년 동안 처절하게 죽어가다가 종교적 체험에 의해서 살아나기 시작한 것도 기적이고, 황당한 몸을 가지고 70일 만에 검정고시를 합격 하고, 또 110일 정도를 공부해서 성대 조경과에 입학한 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1시간 정도만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나면 눈이 아프고 붉어지다가 부어오르기까지 한다. 특히 컴퓨터 화면은 30분을 못 봐도 눈이 부어오르는 상황인데도 책까지 쓰고 있다.


남들에게도 그렇지만 나에게는 기적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과거의 희한한 삶이, 지겹도록 투쟁하면서 살아야 하는 과정이나, 치열하게 시도하는 현재의 삶 자체가 이미 ‘상식의 선을
넘어 선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적인 삶’이다.





6


또 다른 일화는 나의 춤에 관한 이야기다.

79년 8월의 종교적 이적은 당시에는 유행했던 (?) 부흥회 기간에 체험했다. 78년에 천막 교회로 시작했던 ‘율전장로교회’ 에서 처음으로 부흥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앞날을 투시하고, 예언한다는 사람들이 몇 명이 있었다. 그들 중 2∼3명이 나보고 이 기회에 살아나는 것 뿐 만이 아니고, 춤 잘 출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길거리에서나 성대 전철역에서도 춤 출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지 10년 뒤인 89년 가을에 성대전철역 공터에서 ‘율전성당’에서 개최한 바자회 마당에서 폭발할 것 같이 춤을 춘 적이 있었다.

춤을 잘 출 것이라는 79년 8월의 말은 89년 10월 그들이 지정했었던 장소에서 이뤄진 셈이다. 일부러 79년 8월 말들을 의식한 것이 아닌데도 장소까지도 맞아 떨어졌다. 89년 10월 율전역(성대 앞 역)에서 미치도록 폭팔하도록 도와 준 음악 중에서도 유독이 ‘스콜피언스’의 ‘Always somewhere' 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또 2003년의 원고 교정 때 내 옆에서 워드 작업을 도와주었던 백**도 그날의 광란을 보았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2~13 살 정도였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던 때였는데, 89년 10월 성대 앞 광장에서의 ‘그야말로 미친 듯이 폭발한’ 내 모습 이 그의 기억 속에는 ‘울부짖는 자유인’으로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물론 77년 8월에는 나 자신도 내가 살아나서 춤을 잘 출 것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이미 2년 동안 죽어 갔던 몸이라 춤은커녕 일어서 본 적이 1년이 넘은 몸이었다. 그때는 엎드리거나 기어 다니는 것은 아예 불가능 했고 업히는 것도 힘든 몸이었다. 업히지도 못하는 몸이 춤을 잘 출 것이라니,... 말이 되어야지 믿던지 말던 지하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 (?)’이었다.


정확히는 콧방귀를 낄 정도로 못 믿었었다.


그런데 1·2년이 지나면서 79년 8월의 콧방귀는 무색해졌다.

82년 대학에 입학한 뒤, 봄 M.T에 가서 춤 한번 추고서 교수나 학생들에게 ‘날라리’로 찍힌 적이 있다. 그 당시도 몸의 회복기여서 봄 M?T에 갈 때까지도 디스코장이나 나이트클럽에 가 본적이 없었다.(디스코 장은 봄 M.T이후 2달 뒤인 내 생일날에 처음으로 가 봤음)


이정도의 춤 솜씨가 내 춤이다.




top
TAG

Trackback Address :: http://mryoum.com/blog/trackback/211

Write a comment


◀ PREV : [1] : .. [71] : [72] : [73] : [74] : [75] : [76] : [77] : [78] : [79] : .. [258]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