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7.8절과 12절 사이의 ‘그러므로’는 대등절이다.

사회 / Society 2006/09/11 14:30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그러므로...너희들도 남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어야 한다.




분명히 예수의 전인격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이고, 또 기독교의 교리이다. 기독교는 지난 2000년 동안 그야말로 누룩처럼 부풀어 올랐고, 겨자씨처럼 크게 성장했다. 한국에서도 기독교인과 교세는 지난 100년 동안 몇 십 배, 몇 백배로 늘어났다.

그렇다면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전해 준 기쁜 소식, 다른 말로 하면 ‘예수 복음’의 핵심인 이사야 61장 1?3절, 누가복음 4:18절, 누가복음 1:46?55절 의 말처럼 - 그 외에도 4복음서 곳곳에 나타난 - 가난한자, 병든 자, 무식한자, 갇힌 자, 눈먼 자, 귀신들린 자, 들이 줄어들어야 하고, 부정부패가 고개를 숙이고, 사회 정의가 활개를 쳐야 한다.

분명히 이론대로라면 또, 기독교 교리대로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정 반대이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던 서구 사회에서도, 축복의 도가니라고 일컫는 미합중국에서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는 한국의 기독교도, 모두가 급성장 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난한 자, 병든 자, 무식한 자, 갇힌 자, 눈먼 자, 귀신들린 자, 억울한 자는 아직도 많이 있고, 부정부패 등은 여전히 계속된다.

많이 있거나 계속되는 정도가 아니고 늘어만 간다.

뭔가 맞지 않는 얘기다. 모순도 대단한 모순이다.


가난한 자, 병든 자, 무식한 자, 갇힌 자, 눈먼 자, 귀신들린 자, 억울한 자, 사회적 부정부패 등은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교회나 성당에서 무릎 꿇고 기도만 한다고 해서 해결 되지 않는다, 개인이건, 사회 조직이건, 정당 이건, 정부 이건,... 그 누군가가 나서야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 복음의 내용 속에는 전제 되어 있다.

즉 종교적인 이론이 아니고 종교적인 행동이 요구되고 있다.


가진 자, 똑똑한 자, 건강한 자, 권세 있는 자, 명예 있는 자,...소위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손해 보지 않거나, 아량을 베풀지 않는데 저절로 가난한 자, 병든 자, 무식한 자, 갇힌 자, 눈먼 자, 귀신들린 자, 억울한 자....‘사회의 아웃사이더인생들’이 저절로 없어지거나 사회적으로 만연된  부정부패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성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유독 한국교회에서만, 특히 강대상에서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이 깃든 설교를 하면 ‘자유주의 목사’나 ‘이단자’로 몰아세우는 이유조차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 갈 것이 있다.

대다수의 한국 목사들이 마태복음 7:7?12절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는 유독 7, 8절만을 강조한다.


7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요

8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즉 너희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마태복음의 본문은 그렇지가 않다. 7.8절이 기도에 대한 언급이라면 9.10.11절은 7.8절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중요한 것은 12절의 시작,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이다.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를 사용한 것은


12절: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와 7절 ‘구하라·찾으라, 두드려라’ 을 연결해서 해석하라는 얘기가 된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접속사가 ‘그러므로’, ‘그래서’ 인 경우에는 앞 문장과 뒤의 문장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 문장과 뒷문장이 대등관계나 종속관계를 유지할 때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를 쓰게 된다.

A와 B문장을 연결할 때 A와 B중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즉 7.8절과 12절의 내용이 대등하다는 얘기다.

이것을 마 7:7?12에 적용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행위와 인간이 인간에게 베풀어주는 선한 행동은-종교적 차원에서-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이런 식으로 마7:7?12절을 풀어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 그러면 하나님은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었듯이) 너희들도 남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입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되느니라.” 가 된다. 


가난한 자가 부해지고, 낮은 자가 높아지고.... 특히 마태복음 5장. 눅 1:46?55의 찬가는 역동성의 진수이다. 역동성의 하나님께 희망을 걸고 매달리는 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고, 하나님의 베풀어 준 은총이고, 구원이고, 기도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도 ‘역동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개인 혼자만의 힘으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

현대인은 삶은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의 노력만으로 평화가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

매일 3번 '샬롬'으로 상대방한테 인사를 해도 평화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평온한 질서를 원한다고 해도 주변의 상황이 뒷받침 해 주지 않으면 그 개인의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미합중국 백인위주의 신학교리인  ‘근본주의신학’을 대한민국내의 대부분의  교회나 목사들, 그리고 교인들이 미국인들보다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구약의  전쟁 이데올르기인 ‘성전’이나 ‘용사이신 하나님’의 개념 없이 성경을 보면,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나만을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승리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 되는 반면, 반대편에서는 ‘잔인한 하나님’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는 죽음의 하나님’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현대 전쟁의 윤리에는 이론적이나마 어린이와 여자 그리고 민간인은 보호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구약 속에 나타난 전쟁에는 이정도의 윤리마저도 없다. 뱃속의 아이까지 끄집어내어 죽이는 게 구약의 전쟁이다.

이런 부분들을 서구의 제국주의들이 15세기부터 남의 나라를 침략하면서 벌인 식민지전쟁 때 그대로 일어난 일들이다. 또 미합중국 내에서도 그대로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극히 일부지만 ‘검은 너구리는 말한다.’,‘멍청한 백인들’...등 백인의 역사, 승리자의 역사, 미국의 역사,..기득권자의 역사를 반성하자는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떠오를 때도 있다.

헌데 대한민국의 목사가 미합중국이나 백인들의 역사를 비판하면, 대다수의 한국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에 의해 ‘자유주의 목사’가 되는 게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들과 성경이 말하는 본문의 역사성과 의미를  다시 해석하는 나를 보고 한국교회 목사나 교인들은 아집이 강하다고 하지만, 난 그들의 설교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들어 준다. 하지만 그들은 아예 내 신학이나 설교를 무시하고 있다.

내가 아집이 강하고 고집불통이라면, 소위 예의 바르고 겸손하다는 목사들은 나보다도 아집이 더 강하고, 더 고집불통이라는 말이 된다.




내 홈페이지 http://www.mryoum.com/main.html 은 내 자신을 인터넷이라는 넓은 세계에 내보이려고 만들었지만,  건강, 당뇨, 춤, 다이어트. 신학, 설교..내용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 내 정보를 이용하기를 원하고 있다.

내 집(블로그)를 방문한 모든 이들에게.... Thank you!


                                 ,...울부짖는자유인 염상명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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