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1./ Naked Life1.'에 해당되는 글 75건

  1. 2007/12/31 총. 칼보다도 더 무서운 무기....
  2. 2007/10/30 네 멋대로 살아라!
  3. 2007/09/20 Dance with me!
  4. 2007/08/28 말이 씨가 된다.(1)
  5. 2007/08/28 말이 씨가 된다.(2)
  6. 2007/08/28 말이 씨가 된다.(3)
  7. 2007/07/15 3-‘아버지’라는 이름을 그리워하며,...(1)
  8. 2007/07/15 3-‘아버지’라는 이름을 그리워하며,...(2)
  9. 2007/06/25 66. - 죽 · 지 · 않 · 고 · 살 · 아 · 서
  10. 2007/06/15 65.-남들한테 짐짝처럼 대접 받는 인생살이는 싫다.
  11. 2007/06/14 64.- 30년이라는 세월동안 간직해 온 경험, 상처, 지혜...
  12. 2007/05/30 63. -내 인생의 광기어린 육필원고...
  13. 2007/03/24 62.- 별 짓(?) 다해가며 살아 온 덕분에....
  14. 2007/03/23 61.- 춤 짱 목사의 생각들과 행동들 ...‘엽기’ 그 자체
  15. 2007/03/18 60. - 관절 퇴화의 지름길??
  16. 2007/02/20 59.- 미용사의 꿈과 ‘인류를 아름답게, 사회를 아름답게!’
  17. 2007/02/20 58. - 햇볕, 더위, 열, 스팀, 히터....끔찍한 인생살이
  18. 2007/01/10 57. - 부모자식간의 단절된 관계
  19. 2006/12/31 56.-‘단말마적인 허우적거림’으로 ‘지랄 발광을 떨 때....’
  20. 2006/12/31 55. - 성대 입학사건과 내 인생에서 가장 편했던 시간들...
  21. 2006/12/26 54.-사랑, 사랑, 사랑∼ ‘사랑’의 홍수 속에서 살지만....
  22. 2006/12/26 53. -모모는 꼬마 철부지. 나는 45살의 철부지.
  23. 2006/12/14 52. - 왜?.... 내 정체성에 대한 혼돈...
  24. 2006/12/06 51.- 발가락에 콘돔을 씌운 후에....
  25. 2006/12/05 50.-‘한 마리 새처럼’... 옷을 입지 않고 춤을 춘다!!
  26. 2006/11/30 49. -“x 주고도 뺨 맞는다.”는 속담처럼....
  27. 2006/11/29 48. - 내 지난날의 생활 방식....
  28. 2006/11/28 47. - 꼴사나운 ‘똥 폼’? ...쉽게 볼 수 있었던 풍경!
  29. 2006/11/23 46. - ‘내 인생의 휴식시간’
  30. 2006/11/22 45. - 용감무쌍한 기질...내 인생의 가장 큰 밑천
  31. 2006/11/22 44. -외모는 모델, 날라리....성격은 ‘외유내강’
  32. 2006/11/10 43. -누울 곳을 찾아 헤매며 보았던 학력고사....
  33. 2006/11/10 42. -학력고사 보는 날
  34. 2006/11/10 41.- 학력고사, 그리고 성대 조경과 82학번 입학!
  35. 2006/11/07 40.-1981,5월 후...영원한 민방위...영원한 인슐린 주사!
  36. 2006/11/07 39. -‘죽는 순간까지 간직해야 할’ 나만의 독기와 아집....
  37. 2006/11/06 38. - 왜? 왜? 왜?....
  38. 2006/11/06 37. -걷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39. 2006/11/06 36.-1980년11월, 당뇨병의 재발(?)
  40. 2006/10/31 35. - 내 페니스는 22개월 동안 ‘발기 한번 안됐다.’....
  41. 2006/10/31 34. RH-787음독 후 3달 정도가 경과한 후의 시간에는....
  42. 2006/10/23 33. - 1980년의 여름은 내 생애에 가장 편했던 여름!
  43. 2006/10/04 32. - .... ‘미친놈처럼’ 이라는 수식어!
  44. 2006/10/04 31. - 나의 화려한 인생살이와 찬란한 여름(?)
  45. 2006/09/29 30. - 나의 지겨운 ‘여름살이’
  46. 2006/09/27 29. -가난한 심장병환자들의 ‘열과의 싸움’
  47. 2006/09/21 28.....너무 뒤늦은 시간이지만....이제야....
  48. 2006/09/21 27. - 소태 같이 쓰디 쓴 책
  49. 2006/09/21 26....RH-787 음독 자들의 필수적인 삶의 조건....!
  50. 2006/09/20 25....환자의 자존심을 키워주라!
  51. 2006/09/20 24. 환자들에게 유용한 마사지 이론들....
  52. 2006/09/19 23...썸머 타임-Summer Time
  53. 2006/09/19 22. - 천의 얼굴, 천의 몸뚱이
  54. 2006/09/19 21....단장의 미아리 고개.... 애간장이 녹다!
  55. 2006/09/15 20. 밤이면 밤마다....똥 싼 놈 주제에 ...
  56. 2006/09/15 19. ...겨드랑이가 가렵기 시작했다....
  57. 2006/09/15 18. - 황당 엽기 발랄....그리고 보편성과 고정관념
  58. 2006/09/15 17. - 과제물 - 산다는 것?
  59. 2006/09/15 16. - 투쟁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
  60. 2006/09/15 15. - 미친....미친놈! - ‘crazy....crazy guy?’
  61. 2006/09/14 14. - 늙고, 병들고, 가난하고....사망 0순위
  62. 2006/09/14 13. - 심장에는 열이 완전히 독약....
  63. 2006/09/14 12. 부작용과 특이체질-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들....
  64. 2006/09/14 11.....딱 꼬집어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65. 2006/09/11 10. - 1978년 여름의 찜통더위!
  66. 2006/09/11 9....살아 날 것에 희망을 두지 말라...
  67. 2006/09/11 8. - 인간의 몸은 ‘사마귀’와 닮은 꼴?...
  68. 2006/09/07 7. ‘자위행위’-최고의 건강지킴이?....
  69. 2006/09/07 6.추락하는 것에도 날개가 있다??
  70. 2006/09/07 5.‘성기 발랄한 나이’의 ‘영원한 내 장난감(?)’을 기억하며...
  71. 2006/09/07 4.....끔찍할 정도의 멍에
  72. 2006/09/07 3. ‘투쟁’ 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삶의 연속
  73. 2006/09/07 2.시간 너머의 끔찍한 시절...의 그 시절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전부(?)
  74. 2006/09/07 1. 느낌이 있는 삶! -1977년 가을,
  75. 2006/08/28 46살의 이미지- Out of 46-Year-Old Image.

총. 칼보다도 더 무서운 무기....

인생1./ Naked Life1. 2007/12/31 11:41






6. 스트레스와 홧병 1.



- 스트레스가 총. 칼보다도 더 무서운 살인무기가 된다.



내 인생에 있어서 2번째로 힘들었던 2001년에서 2004년, 특히  2001년 여름은 신인돈목사와의 트러블과 최영철의 삼성카드 보증인으로서 최영철의 삼성카드 채무 빚 문제로 화병에 시달리는 것이  화근이 되어 온 몸이 붓고, 심한 냄새가 나는 오줌을 누던 때였다.


그때까지는 맘 좋은 후배로 생각하면서 10년을 가깝게 지내왔던 진용석까지도 그 기막힌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아니면 내 카드를 도깨비 방망이나 요술 방망이 정도로 여겼는지 모르지만 자기에게 돈이 필요할 때마다 찾아와서 낮이고, 밤이고,1주일이고,2주일이고,... 심지어는 1달이고 2달이고 끈질기게 찾아오면서 “...돈 좀 꾸어 달라”면서 무조건 떼를 쓰곤 했다.


2001년 10월과 11월,12월에는 내가 사는 아파트로, 2002년 2월과 3월에는 교회로 찾아왔다. 욕도 하고, 야단도 치고, 큰소리도 쳐 보았지만 그 앞에서는 헛수고였다.

부탁을 거절하면 해 줄 때 까지 떼를 쓰는 통에 욕하고, 야단치고, 큰소리치는 바람에, 가뜩이나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만도 지겨운 마당에, 주위 사람들한테 나를 완전히 이상한 놈으로 각인시키는데 한 몫 거둔 인물(?)이 진용석이다. 결국은 그에게 2001-2002년에 해준 돈을  2007년 2월까지 카드 돌려 막기로 버티고 버텼는데....

2007년 2월 현재, 진용석이 나한테 가져올 카드 빚이 원금과 이자 합치면 1800만원정도이거나 그 액수를 웃도는 돈이 될 것이다.





2001년 늦가을에는 2000년부터 시작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서 몸이 엄청나게 부은 상태로 힘들게 살아야만 했는데, 그 때도 교회로 찾아와서 내 카드를 이용해서 돈 좀 쓰자고 억지를 부렸다.

그 날은 부어서 힘든 몸으로 교회벽면에 글씨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나를 도와서 글자를 붙이거나 아니면 내가 글씨를 붙이기 위해서 올라간  의자라도 붙잡아 주었으면 좋으련만, 의자조차도 붙들어주지 않고 교회장의자에 앉아서 “돈 꾸어 달라”는 소리만 되풀이 하면서 억지를 부리는 그에게 짜증을 내고, 큰 소리로 욕을 하다가 나중에는 양발을 벗어서 퉁퉁 부은 발을 그의 눈앞으로 보여주었다.

퉁퉁 부은 발까지도 보여주었는데도 내 몸이 심하게 부은 것은 그에게는 안중에도 없고 여전히 돈만 빌려달라고 떼를 썼다. 10살짜리 초등학생이라도 그날의 그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눈과 귀는 없고, 입만 있는 희한한 인형과 말을 하는 꼴이다.


그 날은 2시간씩이나 억지를 부려도 내가 응해주지 않자 교회를 나가면서 내던지는 말이 “남들이 형을 보고 싸이코래!”- 이 정도면 완전히‘예술수준’일 것이다. 나중에 이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자, “다 형을 생각하고, 형 교회를 생각해서 해 주는 소리”란다.

나를 2번만 생각해 주었다가는 사람을 ‘생 송장’으로 만들 놈들이다.


그리고 ‘그 남들’이란 인물은 보험설계사 하는 자기 친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돈 빌려 달라고 떼를 쓰는 그에게 ‘잘난 네 친구들한테 가서 돈 이야기 하라’ 고 하면 자존심이나 체면을 운운하니, 나 보고 살라고 하는 것인지 빨리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는 것인지 분간도 안갈 정도이다.





그동안에 최영철은 최영철대로 TV에 출연해서 (2001년11월, 지금은 없어진 ‘장밋빛 인생’) 자기만 살겠다고 거짓말이나 하고, 진용석은 진용석대로 돈 필요하면 찾아와서 돈 빌려달라고 억지를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2001년 늦가을부터는 2000만원이 넘는 ‘트라젠’ 의 보증까지도 서 달라고 2달 동안이나 억지 부리고, 돈 필요하면 찾아와서 돈 빌려달라고  떼쓰고,...그것도 자기 외삼촌과 사업을 할 것이라면서 나는 알지도 못하는 자기 외삼촌 명의로 뽑는 차에 보증서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진용석의 외삼촌- 즉 그의 어머니 형제는 9남매이다. 9남매를 제쳐두고 그의 외삼촌과는 생면부지인 나에게 보증을 서 달라고 무조건 떼를 쓰니...더구나 그 당시 그의 외삼촌은 신용불량자였다.)

차 보증은 서 줄 수가 없었다.


2달 이상을 매 달려도 끝까지 차 보증을 안 서 주자, 한신대 앞에서 생맥주를 마시다가 기껏 한다는 소리가

“형과 형 교회를 생각해서 제안하는 건데, 형이 차 보증을 서 주면 둘째 외삼촌을 형 교회에 출석시키도록 외삼촌을 설득시킬 테니까 보증 좀 서주라...” 는 기막힌 소리를 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야, 이 미친놈아 ,내가 아무리 힘들게 교회를 하고 있고 ,교인이 없어서 환장을 하더라도, 너 같은 놈들한테 이런 소리나 들어가면서 네놈들한테 교회 나와 달라는 소리는 안 한다. 아예 교회 문을 닫게 되면 닫고 말지....이 미친놈아! 입으로는 온갖 좋은 종교정신과 윤리는 다 주워 담으면서 이걸 말이라고 하냐!”

하면서 생맥주를 마시다 말고 생맥주집을 나온 적이 있었다.

만약에 그때 그의 끈질김과 인내에 굴복해서 차 보증까지 서 주었더라면, 지금쯤은 나 역시도 신용불량자로 되었거나, 더 이상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가면서까지 구차하게 사는 것이 싫어서 자살이라도 할 판국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진용석이 나에게 와서 돈 문제로 억지를 쓸 때마다 “이런 일은 내가 아니고 네 부모님이 할 일이고, 네 부모님이 책임 질 일이다.” 라고 수없이 짜증을 내다가 나중에는 “이 미친놈아, 너 ,나 사는 것은 보이지도 않냐? 나 지금 돈 없는 것 뻔히 알면서 계속 개소리만 할래! 너 지금 독이 올라서 몸까지 망가지고 있는 게 내 꼴이 네 눈에는 보이지도 않니, 미친놈들아” 라고 욕까지 하면 “우리 집 지금 돈 없어서,...우리 엄마도 돈 없어” 하면서 엄청 효자소리만 골라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팔자에도 없는 효자 덕에 나만 더 죽을 맛으로 살아야 하니.... 내가 자기 친 어머니나 되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떼를 쓴 곤 했다.

내 쪽에서도 수 없이 짜증은 내봤지만, 짜증 그 자체로 끝난 덕에 진용석한테만 건너 올 돈만해도 1800만원 정도의 거금이 되었으니...





진용석이 다른 사람들한테는 체면이나 자존심을 운운하면서 유독이 나에게만 별별 희한한 소리까지 해 가면서 억지를 부렸었던 행동 뒤에는, 내 평생을 따라다니는 나만의 특수하면서도 희한한 몸 사정이나 지나치게 화려한 병력을 지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독하게 마음을 먹어도 일상중의 일부분은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더구나 운전도 못하고 그 때까지는 당뇨병환자의 끝을 생각해서 완전 ‘컴맹’으로 살았었다.( 중증의 당뇨병환자들이 말년에 시력을 잃거나 발을 절단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책을 쓰기 시작한 2002년 여름까지도 컴퓨터에 파일을 입력하거나 입력된 파일을 출력하는 작업도 못 했었다. E-mail을 보내는 것도 2004년 5월에서야 배웠다.)


내 형편이 이렇다보니 그에게 사소한 부탁을 할 입장까지 겹쳐져야 했는데-그는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완강히 부인했지만-몇 번은 나에게 드러내 놓고 생색을 낸 적이 있었다.

그들과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내가 자기들을 도와 준 것들은 모른체하고 자기들이 나를 도와주는 것만을 ‘무기로 삼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곤 했다. 내 살아가는 상황이 이렇다보니 필요이상으로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입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안고 가는 “인생살이”이다.





지금도 내가 힘들게 쓴 <아직도 살고 싶다> 와 <구원자, 숨어 게신 하나님이시여>를 신문광고로 내 보낼 돈이 있거나, 내 옆에서 나를 성의껏 도와줄 단 한명만 있어도, 인슐린주사를 30년째 맞으면서 살고 있는 중증의 당뇨병(?)환자인 내 입장을 고려해서, 또 내 눈을 생각해서라도-2007년 한 해 동안에  왼쪽 눈은 망막을 건드리는 수술을 2번이나 했다- 컴퓨터작업은 중단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최후의 돌파구로 생각하고 발버둥을 치면서 마지막으로 뛰어든 것이 2004년 여름부터 시작한 인터넷세계이다.

<아직도 살고 싶다> 의 내용에서 당뇨병환자라면 뒷날을 생각해서 운전이나 컴퓨터, TV시청,... 따위는 ‘피 할 수만 있으면 피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30년을 당뇨병환자로 살아오면서 운전이나 컴퓨터를 못해서 내 인생이 더 힘들고 ,더 지겹게 꼬였는데도 다른 당뇨병환자, 그중에서도 소아당뇨병환자들에게 한 “...무조건 컴퓨터를 하지 말라” 는 나의 말이 얼마나 심각한 말인지를 소아당뇨병 부모들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특히 소아당뇨병을 앓는 어린 당뇨병환자라면 20년,30년,...뒷날을 생각해서 무조건 컴퓨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써 났다.

막말로 소아당뇨병환자들이 ‘컴맹’ 이 되어서 나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죽는 날까지는 “사물을 보고, 식별할 수 있는 시력까지는 간직한 상태에서 죽으라.”는 기막힌 (?) 염려이며, 충고이다.


그런대도 나 자신은 뒤늦게 인터넷 세계에 뛰어 들고 있는 중이다.

이 말은 현재의 내 입장이 이 정도로 힘들고 ,다른 돌파구가 없음을 뜻한다.

2000년 1월 이후에 진용석은 자기가 돈 급하면 내 카드 쓰자는 소리나 하고, 최영철은 나한테만 밀어 놓으면 자기 카드 빚이 저절로 해결 되는 줄 알고, 2000년 5월 삼성카드 카드 빚1390만원을 떠넘긴 것만도 모자라서 2003년 6월에 그의 부인이 임신해 배부른 몸으로 사정사정하면서 하는 부탁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들어주었다가 2003년 가을에 또 카드 현금 서비스로 400만원 만들어 보내준 것도 당하고,...지금 같으면 임신 8개월이 아니라 출산한지 8일 밖에 안 되는 핏덩어리를 안고 와서 사정해도 외면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 밖에 다른 목사 1, 2명도...자기들 때문에 내 인생이 꼬꾸라질 지경으로 꼬였는데도 “...미안 하다”는 말 한마디 안하면서 자기들만 ‘점잖고 우아한’ 목사인 줄 착각하고,..





나 진짜 모르겠다.

내 사정을 아는 그들이 ‘나하고 가깝고, 내가 편해서’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진짜 ‘마음 좋은 허수아비’쯤 으로 보이는 것이지 분간도 못하겠다.

2000년 이후로는 내가 그렇게까지 힘들게 버티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자기들이 필요한 할 말만 했다.

자기들한테 짜증내는 나는 희한한 성격이고, 내 인생 자체를 뒤엉키게 만드는 자기들은 인격이 다듬어진 사람들이라는 말까지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한술 더 떠서 큰소리치고 “지랄 발광하는 나는 인격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고, 자기는 인격적으로 다듬어져서 점잖게 애기 한다” 는 ‘진짜 개소리’같은 말까지 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이 지경으로 주체 못 할 스트레스로 인해서 몸까지 망가지면서 살았다. 당뇨병을 오래 앓을수록 말초신경이나 미세한 혈관들이 망가지는 현상은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망가지는 필연적인 현상보다는 지난 몇 년 동안은 ‘이웃이라고 믿어 왔었던 사람들’에게 받은 인간적인 상처와 그 상처들로 인해서 생긴 스트레스의 영향이 더 컸다.

2003년 12월에 실시한 건강진단에서 ‘신장에 이상이 왔다’ 고 통보를 받았다. 만약에 지난 몇 년 동안에 받은 스트레스로 신장에 더 큰 이상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나 혼자서 짊어져야 할 짐으로 다가 왔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망가지는 부위는 비단 신장뿐만이 아니다.

심장, 눈, 신장,...혈당, 혈압까지 조절이 잘 안될 정도로 온 몸 전체가 심하게 망가지게 되어 있다. 


또 이 사실을 최영철이나 진용석 그리고 나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수 없이 알려 주었어도 결국에는 최영철이나 진용석이 자기들 때문에 독이 바짝 올라있는 나한테 마지막까지도 “신용불량에 걸리더라도 같이 걸리고, 죽더라도 같이 죽자” 아니면“자기들이 살 테니까 나보고 죽으라.“ 는 양심도, 체면도 없는 소리까지 하면서 나를 물고 늘어 질 때도 혼자서 분통만 터트리며 버텨 왔다.


나뿐만이 아니고 흔히 ‘성인병’ 이라고 불리는 ‘진행성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들에게 장시간의 스트레스는 환자들의 몸을 형편없이 악화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기회에 한 마디 더 하자면 장기간 투병중인 환자에게 있어서 심한 “스트레스는 총, 칼, 독약 더 무서운 살인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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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살아라!

인생1./ Naked Life1. 2007/10/30 10:48
 







5. 얌체친구 ( 난, 나 잘난 맛에 산다! )


1.

누워만 있었던 시절을 기억할 때면 기억되는 두 명의 친구가 있다.

염규종과 전*렬, 두 명 모두 고향 친구이다. 79년 여름을 말하거나, 내 인생을 거론할 때면 염규종과 전*렬, 2명이 가장 고마운 친구로 지명되는 인물이다.

당시 규종이네 집과 우리 집은 경기도 수원시 율전동 336번지의 땅위에서 울타리 까지도 같이 써야했던 이웃집이었는데, 규종이는 농사짓는 집안의 장남답게 어린나이 때부터 농사일을 거들어야했다. 이 부분에서는 장남인 그와 막대인 나는 너무 다르게 자랐다.


내가 누워있던 77~79년 사이, 특히 78년은 유독이 가물었었고, 또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해 그가 직접 지은 참외를 딸 때면 꼭 몇 알씩을 챙겨 오곤 했었다.

비록 상품성이 떨어지지는 몇 알의 참외였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규종이의 행동에 내심 고마워하고 있다.





당시 내가 다녔던 파장초등(국민)학교는 시골 학교였고, 어찌된 일인지 파장 초등학교 주위의 동네들은 60년, 61년생들이 심지어는 62년생까지도 나이를  구별하기가 힘든 상태였다. 아마도 60년의 4.19 학생운동, 61년 5.16 군사 쿠데타,...등으로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여파가 당시 시골에서 태어난 신생아들의 출생신고에도 영향을 끼쳐서 유독이 60년, 61년도에 태어났던 아이들의 출생신고까지도 뒤죽박죽 된 것 같다.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는 규종이의 행동이었지만, 79년 8월 이후에 점차로 살아남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마음 한 구석에 규종이와의 2살 차이에 대한 거리감을 뛰어 넘지는 못했다.

동네의 다른 친구들은 이런 간격을 뛰어 넘어서 60, 61, 62년생들이 한꺼번에 어울리는 측도 있었고  60년 생중의 몇몇 친구들은 그렇지를 못했었는데, 나는 어울리지 않는 몇몇에 속했다. 지금이야 2년을 우습게 여기지만 감수성과 텃새, 나이 값이 판을 치는 20대 초반은 그렇지를 못했었다.


그 이후에도 서너 번  그의 신세를 진 적이 있다.

한번은 결혼했었던 여자를 돕기 위해서 결혼을 앞두고 규종이에게 1500만원을 빌렸던 적이 있었고, 책을 출판하기 위해 사용했었던 카드를 돌리기 위해서 2-3번 돈을 빌린 적이 있다.

아직까지는 규종이한테 “고맙다”는 말을 서너 번이나 참고 있는 셈인데, 내가 죽기 전에 마음속에 남겨 둔 빚을(?) 갚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


또 한명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전*렬이다.

오늘날의 내가 있기 까지는 내 부모형제와 서정호 목사님과 전*렬를 인정해야만 한다.

79년 8월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내 핏줄이 아니고, 당시 서정호 전도사(후에 목사를 받음)와 전*렬의 주도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81년도 1월에 안양에 있는 성결 신학교(지금의 성결대학교)에서는 필기시험 없이 서류전형만으로 신입생들을 모집한 적이 있었다. 그와는 81년 1월에 성결 신학교에 입학원서도 같이 낸 적인 있었다. 79년 이후 99년까지 그와는 몇 번은 트러블이 있었어도 그런대로 친구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냈었다.

2000년 1월 1일 내가 결혼을 하면서 그의 변덕스런 성격 때문에 울화통을 터트리다가 2001년 5월 이후에는 결별된 적도 있었다. 최영철의 병풍을 내가 권해서 그가 99년 7월에 구입했었는데, 구입조건은  선구 후지불 조건이었다. 그 돈은 우선적으로 내 통장에서 빼서 최영철한테 건네주었는데 99년 7월부터 2001년 5월 까지 근 20개월 동안 400만원 중 100만원  받았었다.

자기 입으론 한달 용돈으로 400만원이나 그 이상을 쓴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놈이 아무리 내가 권해서 산 병풍이라도 병풍 값 400만원 중 100만원만 지불하고 나머지 300만원은 오리무중이었다.


2000년 1월 이후 몸도, 마음도, 돈도 너무 꼬이고 힘들어서 안산의 교회건물을 정리하고 병점으로 올 때에 그에게 나머지 300만원을 요구했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그리고 병풍을 도로 가져가란다.

여기까지는 참을 만 했다. 당시 잔금 받을 날짜는 5월 31일이고, 이사 날짜는 5월 20일로 기억한다. 하여튼 잔금 받을 날짜와 이사 하는 날짜사이에 10일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전*렬에게 그 사정을 이야기 하고 5층까지 나무 병풍을 옮기려면 이사할 때 가져가야 하니깐 돈 100만원은 2주 뒤에 주겠다고 하니깐 “돈 100만원 가져와서 병풍 가져 가라”고 딱 잡아떼었다.

그러면서 “상명아 너도 사회생활을 해 봐서 알 테지만 거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피차에 딴 소리가 안나오게 돈하고 물건하고 맞바꾸게 당장 돈 100만원 가져와서 병풍 가져가라”는 것이 그의 매몰찬 전화기를 통해 건너오는 답변이었다.


단 돈 100만원의 거래! 무슨 거래! 20개월 동안 잔돈을 주지 않다가 병풍을 다시 가져가라는 조치는 제대로 된 거래인가? 그게 40년 동안 한 동네에서 산 친구놈 한테 할 소린가! 또 그 당시는 내가 너무 힘들었을 때였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던 시기임을 밝혔어도 몰인정하고 매몰찬 그의 태도에는 더 이상 할말을 잃어야했다.




한 달에 용돈으로 400만원이상을 쓴다고 자기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는 놈이 기껏 단돈으로 100만원에 “...거래”운운하는 데에는 진짜 상종하기 싫을 정도로 그가 싫어졌다. 내가 권했다는 이유로 20개월 만에 물건을 퇴짜 놓는 병풍을 2~3일 뒤에 100만원을 마련해 가지고 가서 병풍을 도로 가져왔다. 2004년 여름에는 이 병풍 때문에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지만 최영철이 만든 나무 병풍으로 인해 그와 얽힌 이야기는 여기서 멈춘다.

지금도 79년 여름을 말하거나, 내 인생을 거론할 때면 한번은 가장 고마운 친구로, 한번은 가장 별 볼일 없는 놈으로 지명하는 인물이 전*렬이다.


황당한 몸을 가지고 혼자서 힘들게 출판사를 설립하고, 책을 만들고, 책을 출판하고, 2003년 12월15일 조촐한 출판 기념회를 하기 위해서 극히 적은수의 주변사람들과 초등학교 때의 같은 반 학우들만을 초대했지만, 극히 적은수의 주변사람들 중에서도 반 정도는 오지를 않았다. 전*렬은 초등학교의 반 친구이기도 했는데, 그도 오지 않은 주변인물에 낀다.

뒤에 들리는 말로는 내가 자기네들의 행사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다가 필요한 한 순간에만 “....내 실속만을 챙기기 위해서 자기들을 오라고 하는 ‘얌체’...”라고 했다고 한다.

후에 이런 말을 전*렬을 통해서 듣다 보니 이번에는 내 입에서 ‘미친놈들’이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초등학교 친구들한테 들어야만 했던 ‘얌체’라는 말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싶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얌체’라는 말은 200년 1월1일 내결혼식에 와 주었던 일과 2001년 1월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조문 와 주었던 일을 근거로 한 말들인데, 아버님 이 돌아가셨을 때 조문 와 준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내 몸 사정상, 그리고 내 형편상 초상집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다니지를 않았었다,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하루의 볼 일을 햇볕을 피하기 위해 아침 6시-9시 사이에 해야만 하는 몸을 가지고 남의 대소사에 찾아가서 인사치례를 한다는 일자체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햇볕이 강한 하반기에는 9시 보다도 더 이른 시간에 일을 끝내야만 한다. 또 내가 찾아 갈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사회의 관습상 오전 9시-10시 사이에 집안의 대소사, 특히 초상집문상을 해야 하는 집은 거의 없다.


그러나 결혼식장에는 어느 정도 얼굴을 내밀었었다. 우리나라에서 남자들의 결혼 적령기인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정도이다. 200년1월1일에 결혼한 나와는 1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초등학교친구들 역시 대부분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정도에 결혼식을 했었고, 그 중에 몇 친구의 결혼식에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에 내 결혼식에 와 준 것에 대해서는 크게 고마워 할 입장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초등학교 친구들한테 들어야만 들어야 했었던 ‘얌체’라는 말은 아버님이 소천 한 때에 와 준 것만을 가지고 내가 필요할 때 만 자기들한테 연락하는 ‘얌체’였다는 말이 된다,





3.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진짜 할 말이 많다.

초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녀석들로부터 ‘얌체’라는 말이나 들어야 했던 내 인간성을 논하기 이전에  햇볕, 열, 더위, 습도, 불빛,... 인간의 삶을 유지 지켜주는 이런 요인들에 적응하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25년째를 살고 있는 중이다.(25년은 초고를 썼던 2002년 기준. 지금은 30년) 살고 있는 중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살기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초등학교 때의 반 친구들이나 주변 인물들, 내 가족이나 친척들 모두가 내 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점과, 앞에서도 수 없이 언급했던 미친놈‘이라는 수식어 정도에서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를 않고 있다는 점이다.

2003년 12월15일의  출판 기념회 때도 나의 이런 형편을 스스로가 잘 아는 터라 초대하는 인원수를 극히 제한했었는데, 그 적은 인원까지도 초등학교 때의 반 친구들과 같은 생각들을 했었던 모양이다.


아버님이 7형제의 막내였기에 ’4촌‘이라고 불리는 친척들도 많다. 지난 5년 동안 목사로서 힘겹게 버텨오는 기간 중에 단 한명의 4촌조차도 얼굴 한 번 내밀지를 않았다. 4촌들 중에는 기독교인들도 있고 비 기독교인들도 있지만, 그 많은 4촌들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인사치레로 한번쯤 들려주는 절차조차도 생략해 버렸다. 심지어는 친조카사위 녀석도 결혼한 지 4년이 지나 5년이 되어 가는데도 처삼촌, 아니면 처 작은아버지인 나에게 한번 들려서 인사하는 절차조차도 생략한 채로 살고 있으니,...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욕을 얻어먹을 정도로 살지도 않았다. 내가 살면서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나에게 품는 감정이란 게 고작 “...제 까짓게” “...제 주제에” 라고 무시하지 않으면 질투, 시기, 대립,...이런 종류의 감정 인 것 같다. 




내가 몸담고 있는 목사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몸을 가지고서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내 나름대로 목회를 하는 것에 대해서 격려는 못해 줄망정 몇몇 목사들은 (극히 적은 수의 목사들만 알고 지낼 뿐이지만) 온갖 어려움 가운데서도 내가 교회를 계속한다고 해도 묘하게 비웃는 표정이나 짓고, 책을 쓴다고 해도 비웃거나 고개를 흔들고. 그 책들을 알리기 위해서 내 나름대로 인터넷작업을 한다고 해도 비웃고, 내 개인 홈페이지를 활용 해 목사로서 살아남겠다고 해도 비웃고,...심지어는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목회하려면 목사를 그만두라.”는 말까지도 내뱉는 후배목사도 있을 정도다. 속이 비틀린 족속은 내가 아니고 오히려 ‘내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지금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 중이지만 햇볕, 열, 더위, 습도, 불빛,...에 내 몸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은 낮 시간동안의 외출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여름 4개월 동안에는  산책과  집안일도 햇볕이 강하기기전인 아침 6시-9시 사이에 해야만 한다. 오전 9시 이전에 하루의 볼 일을 다 해야 한다. 1년에 6개월 이상은 은행일도 대부분 이 시간정도에서 해야만 하는 게 나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이다.


이런 부분들이 내가 부딪치고 있는 사회생활이고 인간관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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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ce with me!

인생1./ Naked Life1. 2007/09/20 09:36




4. Dance with me!


나와 함께 춤을 - 춤 짱(?) 염상명목사의 춤과 건강에 대한 생각....




내 홈페이지 www.mryoum.com 의 동영상에서 내 춤 동작을 본 사람이라면, 목사라는 사람이?....책에서 지금까지 했었던 자기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 몸으로!...을 생각 할 수도 있다


내 몸에 맞게(?) 행동 했더라면 79년 8월 이후에 내가 해 낼 수 있었던 동작들이라야 느릿느릿, 조심조심 걷는 것까지만, 먹을거리는 죽이나 스프 또는 질척한 밥 정도에서, 그 외에도 춤, 당구, 볼링, 목사, 출판,...이런 것들을 시도조차도 못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끝났을 것이다


77년 이전에는 특별하게 춤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춤에 관심을 갖고서 좋아 한 것은 80년 이후부터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와 경제?날씨까지 엉망인 80년 여름에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했었다. 집에서 흑백 TV로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를 지켜봤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본선에 ‘미스코리아 진’ 김은정(?)양을 포함해 12명의 각국을 대표하는 미녀들이 뽑혔는데 본선에 오른 12명의 미인들에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이 원피스를 선물하기로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원피스를 자기 취향대로 선택하여 골라 입은 후에 12명의 후보들이 최종 인터뷰 심사를 행해지기로 예정되었는데, 본선에 뽑힌 12명의 미인들이 원피스 고르는 것을 돕기 위해서 당시 우리나라의 톱 모델 12명이 그 원피스들을 입고서 세종문화 회관 무대 위를 모델들만의 독특한 걸음으로 누비고 다녔다.





세종문화 회관의 넓은 무대가 좁다고 걸어 다니는 모델들을 보다가 ‘아하, 바로 저거야!’를 속으로 외쳤다. 그날부터 내 걸음 걸이가 희한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내 몸 상태라야 계단을 내려 올 때는 계단에 발을 모아서 한 계단 한 계단을 옆으로 내려오고, 또 다시 발을 모아서 옆으로 내려오고,...한 마디로 말해서 ‘위태위태하면서도 엉거주춤하게’ 내려오던 때였다.


또 -지금처럼 무릎이 시린 증상은 없었지만- 발바닥이 너무 약해져서 당시의 시골집의 마루 바닥을 밟는 게 힘들어서 한 여름에도 양말을 신어야만 했었던 시기였다.

그럼 몸에 여자 패션모델의 걸음걸이를, 무대가 아닌 일상의 생활에 옮겨 왔다.


1권 ‘아직도 살고 싶다’의 Ⅰ부, 성기능부분에도 나오지만 모델들의 무대 걸음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운동 효과가 있다. 목과, 척추, 무릎을 곧게 펴고, 대신 어깨와 골반은 제각기 움직이는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한번 생각해 보라!

걷는 것도 위태위태할 정도의 몸에, 몸무게는 고작해야 44∼46㎏정도, 지금처럼 리드미컬하게 걷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뒤뚱뒤뚱, 어깨 따로 엉덩이 따로,... 지나가던 사람들도 뒤 돌아 볼 정도의 걸음걸이였다.


지금도 내 걸음걸이는 중년남자나 다른 목사들처럼 점잖고, 무게 있는 걸음걸이하고는 거리가 멀다.




대학시절에는 춤과 패션으로 학교 내에서 유명 인물이었다.

우스운 일화 2∼3가지만 말해 보겠다.

3학년 수학여행 중에 과대표 하던 친구가 “야! 상명아 너 지금 춤 동작 연습하고 있냐??.... 걷는 게 아니고, 나비가 팔랑거리는 것 같다!”고 할 정도의 걸음걸이였다.


또 다른 일화는 (이것도 수학여행 중에 일어난 일인데,) 그때 여관방을 4개 잡았다. 1개는 수학여행을 인솔하는(?) 담당교수, 1개는 여학생 방, 나머지 2개는 남학생 방 이었다.

난 지금이나 그때 나 일찍 자는 편이다. 수학여행 중의 다른 친구들이 큰 방에 모여서 놀 때도 난 잠을 자기 위해서 작은 방에서 샤워하고 베이비 기름을 온 몸에 발라서 마사지 한 뒤, 옷 하나 걸치지 않고 큰 대자(大)로 누웠다. 내 이런 모습을 본 과 친구 녀석이 소문을 내는 바람에 다른 친구들까지 야단법석을 떨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에까지 내 몸에 대한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84년 당시) 178㎝ 혹은180cm, 57∼58㎏의 몸무게, 적당히 음식조절하고, 춤을 자주 추고, 뒤뚱거리며 걸어서, 나만의 독특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보통의 다른 남자들이 이 신체 조건이면 ‘너무 말랐다는’ 말을 듣는다. 헌데 나는 옷을 입으나 벗으나 ‘말랐다’는 말보다는 ‘야하다’는 말을 더 많이 듣는다.

어깨나 골격 등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좁거나 넓거나 작거나 하지 않는 균형 잡힌 골격이다. 이 골격 위에 살이 있을 곳만 최소한으로 붙어(?)있는 일명 ‘뼈다귀 위에 초배 한 몸매’-(일명‘튀기’스타일. ‘튀기’는 세계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은 모델이름임) -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그때 보다 2~3kg 늘어나서 공복 시에 60kg 정도의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이 부분은 2003년 초고 원고를 기준). 대학시절의 수학여행은 지금부터 20년 전인 84년도에 다녀왔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아직까지도 20년 전의 몸매와 몸동작과 감성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별짓 다해가면서’ 까지 20대의 몸을 ‘붙잡아 둘 수만 있으면’ 붙잡아 두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얼굴, 몸매, 피부, 체력,...값 비싼 보약들과 각종 건강식품들, 비아그라와 보톡스, 운동 기구들과 다이어트 프로그램, 기능성 화장품들이 팔리고 있는 것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시간의 흐름’을 늦추거나 멈추기 위해서 선택하는 몸부림들이다.


내가 내 삶을 부둥켜안고서 뒹굴러 온지도 벌써 2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나만의 독특한 내 삶의 방식들이 20대, 30대, 40대,...시간이 지나 갈수록 그 빛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내부 속에 잠재된 건강에 대한 희망을 내 방식으로 적나라하게 끄집어내고, 까발리고, 그리고 실행으로 옮겨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는 있는 중이다.





중증의 다른 당뇨병환자들 / 관절이나 류마티스 환자들 /....그 밖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진행성 만성질환으로 몸이 - (특히 관절이나 근육에 경직현상이 오기 시작한 환자들) -망가져 가고 있는 환자들,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장애우들,...에게 사회적 상식이나, 고정관념, 그리고 통속적인 생각들을 접어둔 채 그들의 건강과 남은 인생을 위해서 막-춤을 권하고 싶다.


지금까지 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선입견 중에서 막춤은‘ 젊고, 건강하고, 머릿속에 똥만 든 사람들이 무조건 흔들어 대는 몸동작’이라는 선입견을 버렸으면 한다.


내 글들과, 내 삶과, 내 몸매와 내 춤동작을 통하여 춤, 그것도 막-춤이라도 ‘늙고, 병들고, 머릿속이 꽉 찬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뛰어난 춤동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한다. 오히려 남들보다 나이가 많고, 병들고, 삶 전반에 대한 풍부한 지식까지 갖춘 사람들일수록 춤을 잘 출 수 있는 기질을 간직하게 된다고 본다.

살아오면서 경험한 인생의 사건들을 밑천으로 ‘감정’이라는 가장 값비싼 예술적인 재질을 바탕으로 자신의 인생과 대중문화의 전반에 걸친 식견을 가지고 음악과 춤을 자유자재로 ‘재해석’까지도 해가면서 자신만의 춤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울부짖는 자유인’이면서 “춤-짱”이기도 한 염상명목사의 춤에 대한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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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씨가 된다.(1)

인생1./ Naked Life1. 2007/08/28 10:33




2. 말이 씨가 된다.(1)



1


99년 10월 목사 안수를 받을 무렵부터 예언이나 묵시처럼 ‘3년 동안은 힘들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개척 교회를 시작했지만, 지난 5년 동안은 내가 각오했던 것 보다 ‘더 힘들고, 더 지독하게, 더 끔찍하게 모든 것이 꼬였다. 어디서부터 엉켜버린 매듭을 풀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맬 때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부터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이 계기로‘말의 힘’ 아니면 ‘말의 능력’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인생이나 내 신앙에는 이런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수원시 (장안구) 율전동 336번지였다. 내가 다닌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 캠퍼스는 집에서부터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조경학과 사무실까지 가더라도 15분 남짓밖에 안 걸렸다. 그야말로 ‘누우면 코 닿는 거리’의 학교를 너무 쉽게 다녔다. 또 이런 조건 때문에 그나마 졸업장까지 받을 수 있었다.


72년 아니면 73년도에 성균관대가 천천동, 지금의 자연과학캠퍼스 자리로 이주해 온다고 학교 관계자들이 동네 노인 분들을 모시고 ‘터 잡기 행사’(‘고사’라는 표현이 더 옳은 것 같다. 한국인 특유의 정서로 새로 건물을 지을 때는 그 터의 주인인 ‘터주’에게 돼지머리와 돈, 그리고 막걸리까지 부어 바치면서 절하는 행사. 기독교인들은 ‘**예배’라는 이름으로 바꿨지만 그 근원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의식을 치룬 적이 있었다.


그날 행사에 참석하고 오신 아버님께서 술을 드시기만 하시면 “얘, 대학은 걱정 말아라. 내가 보내 줄 테니, 넌 공부만 잘하고 있다가 이 앞으로 성대가 내려오거든 거기 가면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이런 말씀에 대해서는 나도, 형제들도 별로 믿지도 않았지만 이의를 달지도 않았었다. 헌데 1.2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영 틀린 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72년인가 73년인가부터 이 말씀을 시작하셨는데, 그때까지는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고, 얌전함 모범생이어서 이 말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


중학교 들어가고 1학년 늦봄부터 ‘얌전한 문제아’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형제들이나, 나도, 내가 성대에 입학 할 것 이라는 희망을 갖질 못했다. 다만 내 실력을 모르는 아버님 혼자만이 이 말을 고집하고 계셨다.


그러다가 1977년 11월 초 끔찍하고도 지독스런 RH787쥐약을 먹고 난후 2년 동안은 철저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죽어만 갔으니, 아버지의 이 말은 허무하게 끝난 셈이다.





2


다른 집 자식들은 교복입고 학교에 다닐 때에도  당신 앞에서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누워 만 있는 아버지의 막내자식을 바라보시면서 자식의 앞날에 대해서 꿈을 가졌다는 사실이 ‘너무 허무하고, 쓸데없는 짓거리’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적어도 78년 여름에 나를 본 사람들 중에는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단 1%도 갖지 못했다.


178㎝키에 혹 180cm 30몇 kg의 몸무게, 퉁퉁 부어 오른 얼굴, 더위에 지쳐서 헐떡이는 숨소리, 방안에서 해결하는 똥·오줌조차도 머리맡에 놓아 둔 조카의 변기에다가 힘들게 처리해야 했던 것이 78년 여름 ? (79년 여름까지는 비슷한 형편이었다) ? 의 죽어가던 내 모습이었다.


나의 이런 상태를 보고도 내가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누워서 죽어만 가던 나에게 “얘, 너는 곧 죽어! 이미 살기는 글렇어,...라는 말까지 해 대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말’이라는 게, 아니면 ‘내 운명’이, 그것도 아니면 ‘생명력’이라는 게 참 희한 하고도 끈질겼다. 거두절미하고, 난 기어이 아버님이 습관처럼 말씀하신 대로 성균관대학교, 그것도 집안에 있는 자연과학 캠퍼스에 입학했다.


걷는 것도 뒤뚱거리고, 층계도 제대로 오르내리지 못하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든 80년 봄에는 학원 등록 70일 정도에 대입 검정고시 시험에 합격하고, 81년에는 지독히 아프고 힘든 몸에 -그것도 숨쉬기도 힘들어하는 8월 초순에 시작해서 11월 20일경까지- 약 110일 정도를 혼자서 사립 독서실에서 낮에만 공부하고, 학력고사를 보는 날조차도 시험 중간에 1번은 누워있어야만 했을 정도로 힘들게 치루고, 또 그 몸을 가지고 혼자서 명륜동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더니 부모·형제에게 ‘성균관대학교 조경과’의 합격증과 입학등록금 안내문을 내밀었으니, 참 황당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자식 놈 이었다.

그때 내 몸무게라야 53∼54㎏밖에는 안됐다. 




3


처음부터 ‘성균관대학교 조경과’를 갈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가려고 했었다. 물론 부모님이야 철학과도, 조경과도 모르시던 시골 분들이셨다.

다만 작은형이 “철학과를 나와서 어디다 써 먹을래!”라는 말을 뒤로 하고 입학원서를 사기 위해서 친구 전**불러서 동국대를 난생 처음으로 갔었다.


갈 때는 전철로 서울 역까지 간 뒤에 택시를 타고 학교까지 갔지만 올 때는 버스를 이용해서 서울 역으로 온 뒤에 전철로 갈아타고 집으로 왔다. 그게 ‘동국대 철학과’ 와의 인연의 전부이다. 입학원서를 사가지고 오면서 1주일에 한번 가는 학교라면 몰라도 1주일에 4-5일 가야한다면 ,..내 몸 상태를 고려해보니 내가 서울로 학교를 다닌다는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동국대 철학과’ 입학원서를 사 온 1월 달은 내 몸 조건이 가장 좋은 겨울철인데도 단 1번의 서울 행차로 가고 싶던 학교였던 ‘동국대 철학과’ 입학은 깨끗이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 집에서,더 정확히는 내 방에서 가장 가까운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의 입학원서를 2번째로 샀다.


앞부분에 있는 ‘느낌이 있는 삶’의 46,47번에서 썼듯이 82년 당시에는 ‘조경학’은 별로 알려지지 않는 신설학과였고(82년 당시‘조경학’은 전국에 5개 대학교에만 있었음), 나 역시 조경과에 대한 예비지식도 없이  내 몸과 내 점수를 가지고서 갈 수 있는 대학들과 학과를 골라보니 입학소개 책자에서 내 취약 과목인 수학은 1학년 때까지만 배운다는 ‘성균관대 조경과’ 이상의 조건을 갖춘  곳도 없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82년 1월에 내가 처한 상황이란 것이 앞뒤 따질 조건도 못 되는 상황이었다. 무턱대고 내 몸 조건에 맞춰서 선택한 조경학과였지만, 의외로 내 성격과 맞는 부분이 많았다.


또 그때 억지로 ‘동국대 철학과’에 입학했더라면 아마도 1학기 중간에 도중하차해야만 했을 것이다. ‘동국대’ 가 아니고 수원에 있는 다른 대학교에 입학을 했더라도 졸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집 앞에 있는 학교니까 5, 6, 9월중에도 학교까지 갈 수 있었고, 성대 자연과학 캠퍼스만의 독특한  건물배치나 설계덕분에 학교 가서도 힘들면 아무 때나 눕거나 시원한 건물 입구에서 멀거니 앉아서 쉴 수 있었던 덕에 그나마 졸업을 했다고 생각한다.


86년 2월 대학을 졸업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조경과’와 연관 된 삶을 살아 본 적은 없다. 지금은 82년 입학 때와는 23년이라는 시간적인 격차가 있지만, 82년 1월 내 몸으로 4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학교로 ‘성대 조경학’과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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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씨가 된다.(2)

인생1./ Naked Life1. 2007/08/28 10:14




2. 말이 씨가 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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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집의 자식들 학교얘기만 나오면 주눅 들어 했었던 아버님은 막내 자식의 성대 입학사건으로 인해서 지난날의 뼈아픈 과거를 어느 정도는 씻고, 아버님의 친구 분들에게 자랑스럽게 술대접을 할 수 있었다. 82년 봄, 집 앞에 있는 성대 조경학과에 입학할 때가 파란 많은 내 생애에 있어 아버님께 최고로 효도한 시기였다.


동네의 훨씬 윗 연배 1?2명이 서울의 명문대에 입학 했던 적은 있었어도, 나와 비슷한 연배 중에서는 성대보다 높은 레벨의 대학에 입학한 적도 없었고, 성대에 합격한 적도 없었다. 이 공백기를 깨고 내가 성대에 입학을 한 것이다.


학력고사 보는 날 아침에는 밥상 앞에서 아버지한테 “누가 너 보고 쥐약 쳐 먹으랬냐... 남의 집 자식들은 벌써 대학생인데, 너는 인제 시험이나....”라는 말 때문에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이웃마을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시험장까지 갔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집에서 “우리 집 새끼는 돌대가린가! 남의 집 자식은 삼수는커녕 고등학교도 못 마쳤어도 성대를 가는데, 우리 집 새끼는....”하면서 자기 자식들을 기죽이는 상황으로 역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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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겼던 희망, 아니면 1%의 가능성도 없는 가운데서 이뤄낸 삶?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기적’이나 ‘구원’이라고 부른다.


이 신학용어나 신학사상을 내 삶과 결부시켜보면, 쥐약 먹고 2년 동안 처절하게 죽어가다가 종교적 체험에 의해서 살아나기 시작한 것도 기적이고, 황당한 몸을 가지고 70일 만에 검정고시를 합격 하고, 또 110일 정도를 공부해서 성대 조경과에 입학한 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1시간 정도만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나면 눈이 아프고 붉어지다가 부어오르기까지 한다. 특히 컴퓨터 화면은 30분을 못 봐도 눈이 부어오르는 상황인데도 책까지 쓰고 있다.


남들에게도 그렇지만 나에게는 기적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과거의 희한한 삶이, 지겹도록 투쟁하면서 살아야 하는 과정이나, 치열하게 시도하는 현재의 삶 자체가 이미 ‘상식의 선을
넘어 선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적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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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일화는 나의 춤에 관한 이야기다.

79년 8월의 종교적 이적은 당시에는 유행했던 (?) 부흥회 기간에 체험했다. 78년에 천막 교회로 시작했던 ‘율전장로교회’ 에서 처음으로 부흥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앞날을 투시하고, 예언한다는 사람들이 몇 명이 있었다. 그들 중 2∼3명이 나보고 이 기회에 살아나는 것 뿐 만이 아니고, 춤 잘 출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길거리에서나 성대 전철역에서도 춤 출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지 10년 뒤인 89년 가을에 성대전철역 공터에서 ‘율전성당’에서 개최한 바자회 마당에서 폭발할 것 같이 춤을 춘 적이 있었다.

춤을 잘 출 것이라는 79년 8월의 말은 89년 10월 그들이 지정했었던 장소에서 이뤄진 셈이다. 일부러 79년 8월 말들을 의식한 것이 아닌데도 장소까지도 맞아 떨어졌다. 89년 10월 율전역(성대 앞 역)에서 미치도록 폭팔하도록 도와 준 음악 중에서도 유독이 ‘스콜피언스’의 ‘Always somewhere' 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또 2003년의 원고 교정 때 내 옆에서 워드 작업을 도와주었던 백**도 그날의 광란을 보았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2~13 살 정도였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던 때였는데, 89년 10월 성대 앞 광장에서의 ‘그야말로 미친 듯이 폭발한’ 내 모습 이 그의 기억 속에는 ‘울부짖는 자유인’으로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물론 77년 8월에는 나 자신도 내가 살아나서 춤을 잘 출 것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이미 2년 동안 죽어 갔던 몸이라 춤은커녕 일어서 본 적이 1년이 넘은 몸이었다. 그때는 엎드리거나 기어 다니는 것은 아예 불가능 했고 업히는 것도 힘든 몸이었다. 업히지도 못하는 몸이 춤을 잘 출 것이라니,... 말이 되어야지 믿던지 말던 지하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 (?)’이었다.


정확히는 콧방귀를 낄 정도로 못 믿었었다.


그런데 1·2년이 지나면서 79년 8월의 콧방귀는 무색해졌다.

82년 대학에 입학한 뒤, 봄 M.T에 가서 춤 한번 추고서 교수나 학생들에게 ‘날라리’로 찍힌 적이 있다. 그 당시도 몸의 회복기여서 봄 M?T에 갈 때까지도 디스코장이나 나이트클럽에 가 본적이 없었다.(디스코 장은 봄 M.T이후 2달 뒤인 내 생일날에 처음으로 가 봤음)


이정도의 춤 솜씨가 내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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