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작업...할 말 좀 하고...

인생2./ Naked Life2. 2008/06/29 17:22






**기막힌 내 인생...할 말 좀 하고 죽겠다”고 시작한 번역 작업...



* ○○ 동생


* 사례비.... 지난 12일, 목요일 오후, 은행가는 김에 이번 달 사례비 입금....


* 이번에 보내는 설교는 수정된 2권7 뒷부분 17."당신이 잠든 밤에도..(기적은 일어나고 있다)"....동봉한 파일에 ....몇 번을 손 봤지만 한글 문서를 자세히 보면 시야의 정확도 대신 어른거림만....이번에 보내는 설교까지  3개의 설교번역이 끝나면 2권은 완성...적어도 올해 2008년 안으로 끝낼 수 있기를...이 정도의 성의는 가져주기를...(...동생이 어떤 일을 하든, 틈틈이 다른 글의 번역을 하든 상관없이...)


* 지금부터는 천천히 읽고 생각해 보기를 ...독기인지, 오기인지, 믿음인지, 신념인지....“...죽지 않고 살아서.... 기막힌 내 인생을 넓은 세상에서 할 말 좀 하고 죽겠다”고 시작한 번역 작업....이번 6월로서 꼬박 3년...번역량이 3년에 책 1권(1권의 번역량 포함).....


*인간관계, 돈 관계...모든 것이 너무 힘든2005년 5,6월에 시작된 동생과의 인간관계...그 때는 동생의 선처(?)가 너무 고마웠음...시간이 갈수록...고마움에서 짜증으로...인생을 살다보면 이득이 있을 수도 있고. 손해를 입을 수도 있고...한번 맺은 인간관계를 자기의 필요할 때마다  약삭빠르게 계산적으로 손익만을 따지는 성격은 아님....그렇더라도 시간이 갈수록....‘이렇게 막연하게 시작하는 게 아니고 대략 구체적으로 번역에 따른 조건들의 테두리를 정해놓고 시작하는 건데’ 하는 생각....







* 3년에 책 한권 번역....그동안 왼쪽 눈 2번...수술한 눈으로는 차량 번호판의 숫자조차도 정확히 식별 못하고...한글작업? 진짜 왕짜증...올 4월에 한 발목수술....2-3달 뒤에 5급 장애판단 받을 예정...77년이면 30년도 지난 긴긴 사간이지만 RH787 특유의 병리작용(독성)이 몸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는 몰라도....지난 3년 동안에 의사들이 처방했던 약물들마다 부작용이 나타나 시도 때도 없이 어지럽고....어지럼증이 심할 때는 외출은 물론이고 서 있기도 힘들 때가 있음...입원 할 때, 특히 수술 후에 나타나는 ‘인슐린저항성‘도 수술을 거듭할수록 심해지고 ...이번 수술직후에는 병원측에서 하루에 84단위까지 높여서 주사해도 하루 종일 고혈당...입원도중이나 퇴원 후에도...어떤 날은 하루에 3-4번이나 인슐린을 주사해도 거의 하루 종일 고혈당....그 반면에 어떤 날은 하루에 2번만 주사해도 한 밤중이나 새벽부터 저혈당일 심하게 오고,,,.참고로 2005년 12월 까지는 30-34단위를 1번, 2007년 4월 첫 번째 눈 수술 할 때까지는 대략 40-45단위정도를 2번, 지금은 45-55단위...심한 날은 하루에 4번이나 인슐린을 주사...

....또...또...


*...결국 ’시간과의 싸움‘  ’돈과의 싸움‘  ’자신과의 싸움‘ ...시간이 갈수록 이 모든 것들에....그나마 아주 조금 간직하고 있던  자신감마저도 없어져가고...하지만 끝까지 버텨내야만....치사하고 힘든 삶의 연속이더라도...힘들게 붙들고 버텨내야만 하는 ’생존‘이나 ’실존‘이라는 단어.....이부분이 남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나만의 믿음‘’종교적 가치관‘.... 


* 한번 맺은 동생과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번역의 속도를 부추기기 위해.... 적어도 이런 말들까지 쏟아낼 필요는 없는데도...남들은 물론이고 내 형제들까지 도 ‘미친 놈’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가며 살아 온 인생살이...나 이외의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은 가운데서 내 몸이 더 나빠지기 전에 작정한 번역작업까지 끝내자니... 내 글들이 번역이 끝냈다고 해서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장담도 못하지만...빛을 못보고 애만 쓰다 끝낼 가능성이 더 커도....또 매끄럽고, 호감가고, 유독 잘 쓴 글은 아니지만...그래도 시작한 작업...일단 번역이 끝낸 원고는 가지고 있어야...스스로의 위안감.....

...죽을 때 죽더라도.....‘희망’을 가지고 싶다!!....


*동생이 내 글의 번역에 최선을 다해서 매달려 주기를 바라며 다소 무거운 ...

...그리고  시간을 낼 수 있으면 동생의 얼굴을 보고서 말을 해 보고 싶은데...



* 건강....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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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흔적에 대하여

인생2./ Naked Life2. 2007/11/30 10:19





지난날의 삶1....Why! Why! Why!....아직도 진행형!(ing!)....



1.

최영철,,,,최영철을 10년 넘게 알고 지내왔지만 지금까지도 그의 나이와 전과기록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호적상 53년 생, 본인의 추측으로는 56.57년 생, 그리고 2001년 11월 말 KBS 2TV ‘장밋빛 인생’에 출연해서는 59년 생으로 자신의 나이를 밝혔다.

93년부터 2001년 11월까지는 그의 나이를 56,57년 생으로 알고 지내왔다.


지난 몇 년 동안 몇 개의 사건이 한꺼번에 겹쳐져 산다는 것 자체에 독이 올라서 으르렁거리며 살아왔다. 몇 개의 사건들 가운데서도 최영철이 남긴 상처로 인해 마음고생, 몸 고생, 돈 고생을 크게 하게 했던 장본인이다. 


최영철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93년 4월부터이고, 직접 만나 본 것은 그가 청송 교도소를 출소한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 졌다.


내 성격상 지난 일을 들추는 성격이 아니기에 대충 어린 시절부터 교도소를 드나들기 시작해서 삼청교육대에서 2번이나 교육 받고, 청송 교도소에 2번이나 수감되었다는 것 정도이지, 어떤 죄목으로, 전과 몇 범을 기록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다. 지나치게 화려한(?) 인생 경력을 지녔다는 것 정도로 알고 지내 왔다.


‘지내왔다’ 가 지금부터 쓸 내용이다.

....


2.

최영철이 2번째로 청송 교도소에 수감되기 전에 서울 구치소에서부터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을 찾아 수감 전에 인연이 있었던 서목사님에게 4통의 편지를 부쳤다. 서울 구치소에 보낸 4통의 편지는 내가 간직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없앴다.


이때가 서목사님 내외분한테도 가장 힘든 시기였기에 도움을 청하는 최영철한테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나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당시 신대원을 합격하고 휴학 상태에서 책이나 보고 내 몸이나 관리하면서 신학적 “의”를 생각하며 지내던 나에게 특별한 설명도 없이, 교도소에 있는 사람과 편지로 사귀어 보라는 사모님의 권면에 선뜩 응했다.

내 이름도 모르는 최영철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와 인연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오늘까지 왔으니, 그와의 인연이 10년 넘는 긴 시간동안 이어져온 것이다.






3.

1993년 4월부터 1997년 2월까지 내 쪽에서 190통이 넘는 편지와 소포를 보냈다. 최영철도 비슷하게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나에게 보낸 186통의 편지와 서목사님에게 보낸 2통의 편지를 합쳐서 최영철이 나에게 보낸 188통의 편지를 가지고 있다.


후일 여건이 허락 된다면 나와 최영철 사이에 오고 간 편지를, 내용이 유치하더라도 내용 바꾸지 않고 편지-답장 형식의 책으로 만들고 싶다.



4.

93년 4월 이후 그에게 생일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감성어린 선물을 몇 번 보냈다.


한번은 만화 그리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1년 12달을 상징하는 12장의 그림을 그리게 한 다음, 그림들을 코팅하고 연결고리로 연결해서 보냈는데, -그곳 규칙상 코팅 된 그림은 수감자에게 납입 할 수 없는 물건이어서 ― 그림들을 보기는 했어도 받아 보지는 못했다고는 사실을 출소 후에 밝혔다.

이런 소포가 몇 개 된다.


또 ‘괜히 고상한 척 해탈한 척하며 의욕도, 욕심도 없이, 모든 것에  감사하다’ 는 식 의 그의 편지를 읽고, 당시에 유명했던 “쇼 생크 탈출” 이라는 영화를 예로 들어-살 만한 몸을 가지고, ‘성기 발랄한 몸뚱이’가 허락 될 때-사는 것에 대한 의욕이 남아 있을 때에 출소해서 아직 남은 인생을 ‘남들처럼, 사람답게 살라’는 식의 편지도 몇 번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런 내용의 편지들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사실은 그가 출소한 97년 2월 이후에야 안 사실이다.


 




5.

만 4년 동안 서로가 190여 통의 편지들을 보냈는데도 그때까지 그의 얼굴을 몰랐다.


내 쪽에서는 편지 이외에도 몇 번의 소포와 내 사진을 보내서, 그는 나에 대한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릴 수 있게 했지만, 최영철은 나에게 일부러 자신의 사진을 안 보냈다. 자신의 인생 중에 가장 초라한 시절의 모습을 진심을 보여 가며 자신을 사람대접 해 주는 나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또 청송교도소로 면회 가는 것이 내 몸으로는 너무 힘든 일이더라도 한 번은 가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면회 갈려는 나의 생각을 편지 속에서 읽고는 극구 밀리는 답장이 왔다.

그 이유를 그가 출소한 뒤에야 알았다.


나와 편지로 오래 기간 사귀다 보니 내가 몸도 아프고, 성깔도 대단하고, 그 반면에 의외로 순진하고, 그런 곳의 사정은 아예 백지 상태인 것을 알기에 면회 간다는 내 편지를 읽고는 오히려 뜨끔했다고 한다.


내가 그 곳 사정을 모르는 것이 뻔한데 그곳 사정을 편지로는 알릴 수가 없던 게 그때의 상황이었다. 당시 그의 별명이 ‘딱 통’이라고 했다. 이 말이 도살하기 위한 살진 숫돼지라는 것도 나중에야 그에게서 들었다.


형편없어진 자신의 외모를 보이기도 싫고, 또 내가 면회를 올 때 자신에게만 필요한 것들만 사 가지고 올 것이고, 그러면 자기는 그곳에서 진짜 따돌림 ― 왕 따 ― 를 당한다는 것도 출소 후에야 말해 주었다.


청송 교도소의 보이지 않는 규칙 중 하나가 재소자에게 면회가 오고 먹을 것이 반입되면, 일부는 상납되고 나머지는 같은 방 재소자들 전원이 나눠 먹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내가 면회를 간다는 편지를 할 때까지도 이런 사실을 몰랐었다.


대학시절 수원교도소에 단기간 수감 중이던 고향 선배를 빈손으로 면회 갔던 것이 내가 경험한 교도소에 대한 전부였다. 청송처럼 오랜 시간 수감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실상을 들어 본적도 없었다. 수원 교도소에 고향 선배를 면회 갔을 때도 빈손으로 갔지만, 다른 사람들도 면회 갈 때, 돈 얼마, 그리고 먹을 것 조금, 내복 정도를 가지고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청송교도소의 불문율은 ?앞에서 말했듯이 ? 일부는 상납하고(?) 나머지는 나눠먹는, 가장 바람직한 ‘재분배’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사과를 가지고 간다면 대형 박스로 1박스 이상, 떡을 가지고 간다면 1말 이상의 떡,..... 이런 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가 면회 할 재소자의 몫(?)만 가지고 간다면, 그 재소자는 면회 후에 완전히 ‘왕 따’ 취급을 당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남들이 면회 올 때 마다 얻어먹었는데, 자기 면회 올 때는 ‘혼자 먹고 입 닦은 꼴’이니.... 그가 면회 오는 것을 극구 말릴 만도 했다.


만약 돈으로 가지고 가더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몇 십 만원은 되어야 그 곳에서 많은 물건을 사서 그 물건을 다시 그 재분배 할 수 있지, 서너 개의 물건만 사게 된다면 그것을 누가 가질 것인가...... 이 정도가 안 되면 아예 면회를 오지 않는 게 낫다고 한다.

또 먹을 것을 가지고 갈 때도―옛날 교도소처럼―배고파서 아무거나 덥썩 거리며 먹던 시절이 아니기에 신경을 써서 먹을거리를 준비해 가야 된다는 것이다.


내 친구나, 내 가족, 가까운 친척 중에 청송 교도소는커녕 일반 교도소에 조차도 장기간 수감된 사람들이 없다 보니, 출소 후 최영철이 하는 말을 듣고서야 그때서야 그곳의 형편을 알았고, 또 이해가 됐다.

나뿐만 아니고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4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어도 그의 얼굴을 몰랐다.



6.

청송 교도소 출신의 최영철과 또 다른 1명을 깊이 사귀면서 청송 교도소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된 사실들 중에 하나는, 아직까지 우리사회에서는 금기시된 ‘동성간의 섹스’와 교도소직원들의 비리였다.


청송 교도소는  교도소중에서도 특수한 교도소였다.

청송 교도소수감자들은  5년-7년이 형을 살게 되어 있다. 정확하게는 7년이 조금 못되는 시점에서 출소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종교적인 수도생활이 아닌 사람들이 5-7년, 이 긴 시간 동안에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그들 나름대로 적절하게 해소하고 있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아직도 이런 부분을 깊이 다루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돈의 위력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도 청송 교도소라는 사실이었다.

보통의 재소자들인 경우에는 1달 노역의 품값이 고작 몇 만원인데, 그 곳에서 비밀리에 거래되는 담배 1개비의 가격이 1-2만원이란다.

이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몇 단계가 개입된다는 사실도....


청송 교도소와 삼청교육대는 80년대 초 5공화국 때 악명을 떨치던 곳이었는데, 앞으로 25년 뒤에는 이 모든 일들이 “쇼 생크 탈출”처럼 전설로 남아 있게 될 것 같다. 






7.

95년 대입 검정고시에 재차 응시하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오고 나서부터 그의 편지 속에 시험 준비.결심.불안.초조.긴장.기도.최선...등의 단어들이 눈에 띄게 많아 졌다.  대입 검정고시 시험을 앞두고는 그가 들떠있다는 느낌을  편지을 통해서 느껴지곤 했다.


그 때 내가 보낸 편지 중에 “난, 최영철이란 인간을 선입감 없이 사귀고 있는 것이다. 형제님이 이번 검정고시에서 올 백 점을 맞건, 전국 수석을 하건, 떨어지건, 지금의 사귐에는 변함이 없다” 식의 답장을 보낸 적이 있다.


시험을 치룬 뒤 “한 문제를 실수 한 것 같아 걱정은 되지만 만족할만한 시험을 치렀다. 담담하게 결과를 기다리겠다.” 내용의 편지가 왔다.

시험 결과는 그가 바라던 대로 전 과목 100점으로 전국 수석이었다.



8.

최영철의 95년 대입 검정고시에서 전 과목 100점으로 전국 수석 합격의 쾌거는 대입 검정고시를 2번 합격한 결과였다. 최영철이 비록 좋지 않은 쪽으로 화려한 경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의지와 집념을 가지고 자기 일을 추진해 나갈 줄 아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내가 알기로는 청송 교도소 첫 번째 수감 중에 대입 검정고시를 97점 아니면 97.5로 합격해서 경상북도 수석 합격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청송 교도소에 두 번째 수감 중에 대입 검정고시를 본인이 원한다면 다시 볼 수 있고, 먼저 번 점수 대신 나중 점수로 대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본 다음 남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독방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한다. 그 안에서 오랜 기간을 하루에 4시간 정도의 잠만 자면서 전 과목 100점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


나의 80년 5월의 대입 검정고시 합격점수가 평균 62.5아니면 63.5와 비교해 보면 그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는 쉽게 알게 된다.






9.

96년 말부터 출소하면 꼭 찾아뵙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몇 번 오고 난 뒤 97년 2월 말에 내가 살던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의 전셋집을 찾아오기 위해 성대 앞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그 날 조카와 다른 1명을 과외공부 시키던 때라, 전화를 받고는 조카와 조카친구를 일찍 보내고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편지 속에다 대충 자신들의 외모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어서 첫 대면이면서도 서로 특징 있는 외모(?) 덕에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최영철이 나를 처음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내 편지를 읽고 머리 속으로 생각하던 내 몸보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몸이 훨씬 더 건강하다는 것이다.

그때는 2월 말이었다.


내 몸의 특성상 10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는 당뇨병으로 인해 인슐린 주사를 맞고 합병증 관리에 주의만 하면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까지는 그가 미쳐 생각해 내지 못했다. 편지에 내 몸의 특성을 자세히 밝혔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몸 이상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던 것이다.


2번째로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내 식사습관 때문이었다.

그와 처음으로 대면하고 첫 식사를 내 집에서, 내가 직접 만들어, 내 방식대로 했다. 내가 차린 저녁식사를 보고 그가 “...이렇게 먹고 사느냐?”고 반문하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가 “....이렇게 먹고 사느냐?”고 반문할 정도로 가볍게 먹고 사는 게 내 식사 습관이다. 보통 하루 3번 식사에서 2번은 빵, 떡, 과일, 고구마 , 감자, 커피, 우유, 주스, 맥주(그 당시는 마주앙).....등 보통 사람들이 간식정도로 생각하는 먹을거리들로 2끼 식사를 해결하고 산다. 더구나 혼자 살다 보니 밥상이나 식탁이 있어도 바닥에서 적당히 먹을 때가 많은데, 남들이 볼 때는 황당한 식사 습관일 것이다.

최영철 눈에도 황당하게 보였나 보다.

그래도 그날은 밥도 하고, 냉장고를 뒤져 약병아리로 백숙도 만들었다.


반찬이라고 김치와 한두 가지 밑반찬 밖에 없고, 방바닥에 신문지 깔아 놓고 그 위에 밥, 반찬 등을 모양새 없는 그릇에 담아 놓고 “밥 먹자”는 내 말과 내 태도에 오히려 그 쪽에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날은 평소에는 안 하던 식사기도까지 해 가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해준 저녁식사 이었는데...

밥을 먹으며 내 이런 식사는 자신들이 생활하던 청송교도소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식사라고 했다.


“사람을 빵만으로 살수 없다”,,,,

그때는 이 말을 생각해 내지 못했는데 시간이 흐르다보니 이 말이 떠오른다.






10.

여기서 최영철에 대해서 몇 가지 부연 설명을 하고 싶다.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의지가 강하고 자신과도 싸울 줄 안다고 밝혔다.


그가 97년 2월 말에 출소하고 4월 20일 경까지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구경하면서 서각 학원과 학사고시를 위해서 덕성 여대 부설의 평생교육원에 다녔다. 그리고 4월 20일경에 먹고 살기 위해 택시회사에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단지 전과자라는 이유로 19군데의 택시회사에서 퇴짜를 맞았다.


교도소에서는 대입 검정고시에서 ‘전 과목 만점’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전국 수석을 하고 매스컴에서도 관심을 보였지만, 출소 한 후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차갑기만 했다. 특별한 직업도 아니고 택시 운전을 택했어도, 택시 회사마다 그를 거절했다. 그가 19 곳의 택시회사에서 퇴짜를 맞은 것을 말하는 동안 젖어 가는 그의 눈을 보니 그의 인생이 너무 처량해 보였다.


내가 그를 본격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1.

.....

8월이 이렇게 지나고 9월이 오고 찬바람이 돌 무렵, 새벽에 자기가 운전하는 택시를 몰고 그가 찾아 왔다.,

가톨릭 사회복지분과 위원회 쪽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가톨릭 사회복지 분과 위원회 (가톨릭 교정사목 위원회) 쪽에서 최영철이 97년 2월 출소한 후에도 열심히 사는 것을 7개월 정도 지켜보고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가톨릭 쪽의 연락을 받고 ‘개신교(교회)쪽에 남아 있느냐’, ‘가톨릭(성당) 쪽으로 가느냐?’ 의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고 이른 새벽에 나한테까지 온 것이다.


그 정도로 마음이 어린 면이 있었고, 또 그 때는 이미 목사세계에 대해서 실망을 한 시기이기도 했다. 청송 교도소에서 보낸 편지 중에는 가톨릭이나, 신부에 대한 언급은 없어도 교회나 목사에 대한 언급은 몇 번 있었다.


그날 새벽에 나에게 온 이유를 정리해 보면

첫째, 그의 마음이 어린 면이 있어서

둘째, 개신교(목사)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셋째는 그의 앞날을 생각 할 때 ‘과연 어느 쪽이 끝까지 도움을 줄 것인가’ 이었다.

그의 고민을 듣고 마지막 항목에 맞춰서 그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혼혈 고아, 불행한 어린시절, 화려한 전과 기록, 교도소에서의 ‘검정고시 전 과목 만점’이라는 성과, 그리고 출소 후에 힘들게  버텨내는 당시의 그의 생활태도.... 등을 망라할 때 가톨릭 사회복지 분과 위원회(교정사목 위원회)에서는 최영철이 가톨릭 사회복지의 프로그램의 하나인 ‘사회화’ 교육의 가장 적합한 본보기 인물로 지목된 것으로 해석했다.


나는 처음부터 그를 개인 대 개인으로서 사귀었지만 가톨릭 쪽에서는 달랐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 단체와, 최영철 뒤에 있는 ‘최영철과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의 대표자’로서 만난 것이다. 물론 쌍방합의에 이루어진 조건이나 계약보다는 가톨릭 사회복지 분과 위원회의 일방적인 후원과 교육이 주 내용이지만은, 이런 부분이 나와 가톨릭과의 차이점이었다.



12.

.....

99년 9월 그의 결혼 때까지는 가톨릭 쪽에서 적극적으로 그를 도왔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가톨릭 사회복지분과 위원회에서는 최영철을 지목했을 때 최영철 개인이 아니고 그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집단의 대표자’ 최영철 이었다.


물론 97.98.99년까지 가톨릭 내에서도 최영철과 개인적으로 친했던 사람들도 있고, 또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도와준 사람은 있었다. 그래도 가톨릭과 최영철과의 관계는 집단과 개인이 아니고 집단과 집단의 대표관계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그가 가톨릭 사회 복지 분과 위원회 산하의 ‘나눔의 집’에서 근무한 것도, 97년 ‘이것이 인생이다’와 그 후에 1.2번 다른 방송에 출연 한 것도, 또 ‘대한민국 서각 대전’에 그의 작품들을 출품 할 수 있게 후원해 준 것도, 99년 9월의 결혼도, 여기까지는 가톨릭의 의도에 별 마찰 없이 순응하며 지냈다. 그가 강원도 영월의 초등학교를 임대하고서부터 가톨릭과 큰 마찰이 일어났다.


최영철이 초등학교의 임대권을 받게 된 경위에도 가톨릭의 후원이 컸다.

가톨릭에서는 최영철 개인보다 최영철 뒤에 있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생각했기에, 초등학교를 임대한 다음의 계획까지도 가톨릭 쪽의 의견에 따르기를 바랐었다.

앞에서 한 말과 중복되는 부분이지만 이 부분에서 나와 가톨릭이 달랐다.




13.

내가 최영철을 사귀기 시작한 것은 93년이고 직접만난 것은 97년, 우리나라 나이로 34과 38살 때였다. 내 글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어린나이에 선택한 자살이후, 내가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끔찍했다. 글이나 책에서는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의 삶은 훨씬 더 힘들었다. 또 앞으로도 힘들게 버텨야만 한다.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다 보니 최영철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낸 이후 3-4번째부터는 칼날 같이 날카로운 말(글)을 해 댔다.


그곳 사정이야 어떻든 그에게 온 편지 내용이 ‘감사, 기도, 주님의 뜻, 겸손, 성경,.....’ 진짜 목사 같고, 신학생 같은 소리만 해서 오히려 내가 짜증내며 “창세기부터 계시록의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 까지 서각으로 새겨 봐라. 그렇다고 형제님의 삶이 바꿔지나! 남은 인생에 대해 의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며, 현실을 인정하고 주시하라...” 이런 내용의 답장까지 보낸 적이 있다.


나도 내 삶에 힘들어하며 ‘삶의 의미’, ‘생일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노력하고 살아왔다. 그의 생일날 내 이런 생각을 길게 서술 할 필요도 없이, 생일부케를 만들어 소포로 부쳤다.


난 최영철이 나머지 인생을 남들처럼, 사람답게(?) 살기를 바랐다. 사람답게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지난 과거에 대한 보상이라고 그에게 편지로, 말로,...

2005년 현재도 하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은 달랐다. 최영철 개인보다는 최영철 뒤에 있는 사람들(?) 이해를 돕기 위해 가·톨·릭·사·회·복·지·분·과·위·원·회(가톨릭교정사목위원회) 라는 말을 천천히 그리고 여러 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면 내가 하는 말들에 대해 조금은 느낌이 올 것이다.


적어도 가톨릭 사회복지 분과 위원회에서 사회전반에 걸쳐 out?side의 인생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재사회화’교육을 위한 몇 사람의 모델들이 필요하다면, 최영철은 너무 많은 조건을 갖춘 인물이었다.






14.

최영철이 98년 가톨릭 사회 복지 분과 위원회의 주선으로 신월동 나눔의 집에 근무하면서 서각 작업을 시작했다. 미리부터 나에게 말한 대로 12폭 병풍을 만들어 그 해 대한민국 서 각 대전에 출품해서 ‘입상’과 함께 ‘그 해의 문제작’으로 꼽혔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나도 세종문화회관 전시실까지 가서 그가 만든 병풍 앞에서 폼 잡고 사진을 찍으며 대견하게 생각했었다..... 위에 올려놓은 사진이다.





15.

.....최영철은 나한테만 밀어 놓으면 자기 카드 빚이 저절로 해결 되는 줄 알고, 2000년 5월에 삼성카드 강서채권팀에 연체보증 서 준 빚 1390만원 중에 1200만원 이상의 원금과 카드이자에 이자,...그것도 연체이자로 계산 된 터무니없이 비싼.... 그 와중에도 아들 분유 값이 없다는 눈물어린 사정에  2001년 1월인가2월인가에 LG카드 90만원 막아주고 ,....그 액수를 떠넘긴 것만도 모자라서 2003년 6월부터 그의 부인이 임신해 배부른 몸으로 사정사정하면서 하는 부탁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들어주었다가 2003년 가을에 400만원 또 당하고,...나 역시 돈이 없어서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빌려준 돈이었다....카드원금과 비싼 이자에 이자....


그러면서도 엎치락뒤치락 희한한 인간관계는 유지하고 있었다.



16.

최영철이 2005년 3월 30일부터 4월 5일까지 명동성당 내의 가톨릭회관 1층 ‘평화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졌었다. 그때는 교회의 피아노도 팔고 책도 팔아서 이사비용과 홈페이지를 업 시키는 비용을 마련할 때인데, 이때도 나에게 1주일간의  화랑 임대료 150만원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며칠 내로 보내 줄 테니 40만원만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곳에서도 화랑 임대료 150만원 중에 40만원이 모자라서 ‘물건으로 잡아 논다.’는 그의 절박한 부탁을 듣고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 역시 교회피아노까지 팔아야 될 지경이라면서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약속은 또 무산되었다.





17.

2005년 3월 30일부터 4월 5일 전시회 때도 시인 이 **수녀의 와서 방명록에 ‘희망의 사람’이라는 시와, 문화 평론가 정**신부의 격려의 글...

다 좋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 곳은 그 유명한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평화화랑, 가톨릭신문,...소위 ‘믿음, 신앙, 종교 , 인간...’단어들이 제일 많이 거론되는 곳이었다.


보통 큰 교회의 교인이나 성당의 신자가 이 정도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갖는다면 150만원어치의 물건들을 처분하는 데 1일도 안 걸린다. 하지만, 최영철이 1주일을 전시해도 기껏 화랑 임대료 150만원어치도 팔지 못했다.

이 정도로 힘든 상황이 그가 부딪친 인생여건이고, 내가 그를 도와주는 ‘이유의 전부’이다.


전시회를 끝내고 6일 오후 나에게 왔을 때는 온 식구가 2끼를 굶은 채 내려 온 상태였다.


가톨릭, 사회 복지 분과 위원회, 교목 위원회, 목사 몇 명,  장로, 연극인 ** ....그의 특수한 입지조건 덕분에 몇 번 TV에서 조명을 비춰 준 적이 있었는데, 그와 친한척하거나 그의 이름을 거론 될 때 뒷배경으로 나오는 단체나 이름이고....나는 ‘숨겨진 사람’ 역활...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의 뒤처리를 해 주는 사람은 성당도 아니고 신부도 아니고 수녀도 아니고 유명목사도 장로도 아니고....목사치고 너무 힘들고 황당하게 사는 내가 또 해주었다.


나도 다른 종교인들이나 유명 사회인사들 처럼 말이나 글만 가지고 온갖 생색 다 내가면서 좋은 사람, 훌륭한 종교인, 목사,.... ‘난 척 하는 인물 역할’ 좀 해 보고 싶다.


내 몸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 왔지만 결과는 지금은 내 존재는 내가 도와 준 사람들한테 오히려 짓밟히고 물어 뜨긴 흔적으로 홧병만 간직한 채로 살아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숨겨진 존재’로만 남아있기도 더 이상은 싫다.


그와 인간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2005년 8월부터는 단절한 상태이다.

....






내가 홈페이지와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은 내 인생을 토해내는 글들이다.
어쩌다 한두 번 읽어서는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많은 글이고, 오늘 올리는 글도 긴 분량의 글을  짧게(?) 편집한 글이라 내용이  매끄럽지 못하다. 내 홈페이지
www.mryoum.com은 지겹도록 희한한 내 자신의 전부를 죽기 전에  넓은세상에 내 보이려고 만들었다.

http://ministeryoum.blogspot.com/....나만의 공간으로 잠깐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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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목적....'죽기 전에’ 작정하고 꼴값 좀(!) 떨어보려고....

인생2./ Naked Life2. 2006/10/18 16:57



내가 살아가는 이유(목적)?!....



답변1....놀아도-외국 애들을 상대로-제대로 놀아보려고...놀 줄 아는 놈!!


답변2...,‘죽기 전에’ 크게 한번 꼴값을(!) 떨어 보려고.... 아예 작정하고 꼴값을(?)떨고 있는 중입니다(ing)....나만의 독특한 내 삶의 방식들을 어디까지 까발리게 될지는 몰라도, 지겹도록 희한한 내 삶을 ‘죽기 전에’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지랄발광을 떨고는 있지만, 한마디로 압축하면 “...계란으로 바위깨기”...그렇더라도 ??



** .....밑에 있는 글은 올해보다(2006년에 레이저 수술을 3번씩이나 한 눈임.) 눈 사정이 조금 더 나았던 작년 2005년 여름 활발하게 블로그활동을 하던 때에 블로그사이트 미디어 몹에서 보내온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작성한 초고의 내용들을  2006년 군장대 ‘사회복지계열’에 등록. 2학기에  ‘사회복지행정론’의 과제물2.)

내가 살아가는 이유(목적)?!...’ 에 대한 답변으로 다시 축소/편집해서  제출한 적이 있는  내용임.







1.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름: 염상명

닉네임: 울부짖는 자유인 

나이: 45 (1960년생) - 성별: 남 - 신체조건: 179cm,...

직업: 목사 / 작가 / 출판인

신체적 특징: 인슐린을 주사를 28년째 맞고 사는 중증의 당뇨병환자.


당뇨병의 가장 큰 특징은 진행형(ing)이라는 점이다.

인슐린 주사를 10년 맞을 때와 몸이 다르고, 15년 맞을 때와 다르고, 20년 맞을 때가 다르다. 20년을 넘어서는 1년마다 달라지고 있다. 심지어는 몇 달 만에도 자신의 몸이 바뀌는 것을 감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병에 시달리고 있는 다른 환자들이나 장애우들,...그 밖에도 우리사회에서 out-side로 밀려난 위치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죽지 않고 살아 날 수 있는 방법’ 들을 터득해서 “끝까지 사람답게 살다가 죽으라고!...” 책을 쓰고,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내 방식대로 알리고 있는 중이다.



2. 아이디 '울부짖는 자유인'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1977년11월, 17살에 RH-787이라는 고유한 이름의 쥐약을 먹은 뒤에 처절히 죽어가다 다시 살아남. 그 과정에서 후유증으로 인슐린주사를 맞아야만 하는 I형 당뇨병을 지금까지 앓아왔다.


77년 11월 이후부터는 햇볕, 더위, 열, 스팀, 히터, 난로,... 따위의 모든 열 종류와 더위에 못 견디는 특이한 몸 조건 위에다 시간이 흘러 갈수록  시신경까지도 각종 빛들에도 심한 거부현상을 보이고.... 또  RH-787을 음독한지 28년이 지난 지금은 RH-787의 독성이 가져 온 또 다른 후유증으로 ‘파킨슨씨병’ 증세까지도 어느 정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파킨슨씨병’에 대해서는 종합병원에서 확실한 진단을 받질 않았다.


‘내 인생살이’란 것이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지난 5년 동안 ‘이웃이라 믿어 왔었던 사람들’몇 사람들한테  지독하게 상처를 입고, 그 덕분에 덤으로 돈까지도 심하게 꼬인 인생살이를 하다보니 ‘죽-기-전-에-울-부-짖-어-가-면-서-까-지’ 희한하고도 독특한 내 삶을 토해내고 싶어서...내 스스로가 ‘울부짖는 자유인의 삶을 살아간다.’고 위로하면서 살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2003년 11월에 설립한 출판사, 직원이라곤 나 혼자뿐인 도서출판 ‘울부짖는 자유인’의 상호명이기도 하다.







3. 미디어몹에 블로그를 열기전의 인터넷이나 통신 활동은 어떠했을까요?


2004년4월말에 ‘네이버의 지식in 오픈백과-당뇨병‘에 아르바이트생의 손을 빌려서 글을 올린이후. 그해 5월초에 ’블로그‘라는 것을 찾아내서  몇 군데에 몇 개의 블로그를 개설하고  5월초부터 7월말까지 건강(당뇨병)이나 신학에 대한 글을 올리다가, 3달 가까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동안에 어렴풋이 인터넷상의 특징을 알아가면서 글 올리는 것을 중단했다. 


2004년 4월말에 ‘네이버의 지식in 오픈백과-당뇨병‘에  처음으로 글을 올릴 때는 3편의 글을 한꺼번에 올렸는데 ’네이버의 지식in' 쪽에서 2편은 보류처리 하고, 그곳에서 요구하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 자기네들이 3편을 모아서 오픈백과에 올려줄 정도로 ‘완전 초짜 네티즌’의 글이지만,  ‘네이버의 지식in 오픈백과 카테고리 - 당뇨병‘ 에는 작년 5월과 6월에  mryoum2003 이라는 아이디로 올린 내 글들이 20위 안에 7-8개 실려 있다.


정보세계에서는 “글 내용(책 내용)으로서는 인정받더라도 그 이상의 무엇이(?) 없으면 묵힌 글이나 책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작년 5월-7월에 얻은 가장 큰 수확물이었다.



4. 미디어몹에 블로그를 열게 된 계기는?


올해 5월에 내 홈페이지 www.mryoum.com  을 업 시키는 작업을 끝낸 뒤에  처음계획대로 내 홈페이지를 대한민국뿐만이 아니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광활한 인터넷시장 속에다 내 놓은 방법을 찾던 중에(광고 할 돈은 없음.) Google과 미디어 칸, 미디어 몹, 미디어 정글은 알게 된 것이다.


Google의 Blogger(blogspot)는 5월말에 알았고, 미디어 칸은 7월 초순경,7월 초순경에 ‘stoo.com'에 들렸다가 그 곳의 메인 화면을 여기저기를 클릭해 보다가 ‘블로그 정글‘를 알았고  ‘미디어 몹‘은 그 보다 조금 늦게  7월 중순에 알게 되었다. 






5. 미디어몹 외에 즐겨 찾는 사이트나 홈페이지는 어디인가요?


요즈음은 주로 외국의 블로그들...


3)번의 질문에 ‘....3달 가까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동안에 어렴풋이 인터넷상의 특징을 알아가면서 글 올리는 것을 중단했다.’라는 답변이 있다.

2004년 7월 말부터는 ‘인터넷의 특징을 알기위해서’ 야하고 지저분한 사이트를 찾아다녔다. 누구의 도움 없이 하는 작업이라 야하고 지저분한 사이트 1개를 찾아내는데 만도 하루가 걸렸다. 그 후 2주 동안은 한국의 사이트들을, 그리고 3주째부터는 주로 외국의 사이트만을 찾아다녔다.


‘야하면서도 제대로 된 사이트’를 찾는 루트를 발견하는데도 꼬박 3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다. 2002년까지 컴퓨터를 끌줄도 모르는 사람이 ‘야하면서도 제대로 된 사이트’를 찾는다는 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3달 정도 경과한 다음에야 사진을 담아 올(퍼 올) 외국의 사이트들을 발견하고 10월말이나 11월 초부터 사진을 담는 작업을 했다.


내 홈페이지 업 시키는 작업이 끝난 5월 20일 경부터는 ‘인터넷의 특성과 문화의 흐름, 그리고 인터넷을 이용하여 자기를 PR 하거나(개인이나 단체 모두 포함) 자기 정보를 파는 것을 배우려고...’ 주로 외국의 블로그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Google의 Blogger(blogspot)를 안 다음부터는 홈페이지가 아니고 블로그를 가지고 자기정보를 인터넷 속에 내 보내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자기를 PR 하거나 자기 정보를 파는 방법에 있어 어떤 면에서는 홈페이지보다도 블로그가 유리 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Google의 Blogger를 통해서임.)


외국의 사이트들을 서핑하면서 얻은 결과는,

첫째로, 시각적이면서  감각적인 것이  인터넷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점과


둘째로, 서양 애들의 장사수단이 진짜  뛰어나다는 점이다. 비록 야한 사이트 위주의 웹 서핑이지만 ‘이런 장사꾼들과 한국 애들이 싸워야 되니...’ 하면서 가끔은 가슴이 뜨끔할 정도의 뛰어난 장사꾼들이 모인 곳도 인터넷속이다. 


셋째로, 전 세계의 검색엔진에서는 Google42-43%, Yahoo 30%정도, AltaVista 11-13%점령하고 있고(통계숫자에서 1-2% 오차가 있을 수 있음), 블로그 시장에서는 Google의 Blogger(blogspot)가 전 세계 블로그시장을 20-30%나 점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이 숫자는 통계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내가 느낀 숫자이다). 한국의 블로그 매체들도  Google의 Blogger(blogspot)의 정책을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어도 참고로 할 필요는 있다. 


넷째는, 대한민국에서는 Google ,Yahoo, AltaVista의 사용량이 너무 적다는 점이다.

그나마 Yahoo가 한국에 보편적으로 보급됐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야후 코리아’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사용하는 Yahoo와는  너무 다르고,  홍콩이나 싱가폴에서 (국가 경제력에 있어 아시아에서  대한민국과 비교되는 나라들)사용하는 Yahoo와 비교해도  너무 다르다. ‘야후 코리아’는 국가의 정책에(?) 따라서 폐쇄성을 너무 심하게 고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다섯째는, 아직도 대한민국 행정부의 높은 자리들은(?) ‘무역’이라는 단어를 ‘눈에 보이는 재화’쪽만을 생각하고, 또 그런 위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홍콩이나 싱가폴, 네덜란드...대한민국보다 국가적 자원이 훨씬 부족한 나라들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국가차원에서 인터넷문화를 무제한 OPEN 시키는 정책을 살펴봐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는 점이다. 


아래의 4개의 블로그 주소는 2005년 6월부터  Google  Blogger(blogspot)에 내가 만든 웹 사이트들이다.(영문위주)

1. http://mryoum2003.blogspot.com/  -당뇨병, 건강과 질병

2. http://ministeryoum.blogspot.com/  -종교, 신학, 설교, 사회일반

3. http://sangmyoung.blogspot.com/  -문화, 문화의 연속성 

4. http://bodyandnude.blogspot.com/  -인생, 인간, 인간의 본능


이 4곳을  클릭(방문) 해 보면 Google의 Blogger(blogspot)가 어느 정도의 수용성과 상술로 전 세계의 블로그 시장을 점령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이다. Health ,Culture는  내용 량을  어느 정도 올려났지만,  Life 아직 미비하다. Sex는 사진만으로 구성되지만 hot picture나 hard core 는 취급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 경우에는 이제 막 시작한 터인지라 구글의 내 블로그 1) 3)번에  홈페이지를 업 시킨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7월 22일 구글의 광고체계까지는 올려 났지만, 세계의 유명 ‘블로그 서치엔진’들에는 아직 등록을 못시켰다.

처음에는 서치엔진 몇 곳에 내 블로그를 실어 났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자기네 베넷광고를 내 블로그에 올리는 기술이 없어서 그들의  베넷광고를 실지 못했다. 그들이 내 블로그 주소를 자기네의 서치엔진에 올려났는데도 내 쪽에서 며칠 뒤까지도 자기네  베넷광고를 내 블로그에 실어놓지 않으면 내 블로그 주소를 철수시킨다. 이것이 그쪽의 생리라는 것을 몇 번 경험하고야 알았다.

아마 1-2달 뒤에는 내 블로그 2곳의 내용을 좀더 보충하고 홈페이지와 구글의 블로그 4곳 전부에 구글의 광고체계와 세계의 유명 블로그 검색엔진들의 베넷광고들도 올려 놀 생각이다.






6. 포스트마다 다소 선정적인 사진을 서두에 올려놓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모 사이트의 짤방 (짤림방지)습관인가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어이없는 질문’이라고  무시하려다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라는 생각아래서 자세하게 답변하겠음.


1) 포스트마다 다소 선정적인 사진을 서두에 올려놓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1) 5.의 질문에  ‘시각적이면서  감각적인’ 것이 ‘인터넷의 특징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적었다.  Google  Blogger에 이미 실려 있는 글과(번역된 문장) 사진, 그리고 앞으로 1-2년 동안 실릴 글과 사진을 생각한다면, 미디어 몹에 1달 정도(7월 14일부터 시작했음) 실린 글과 사진을 가지고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는 것이.... 


(2) ‘시각적이면서  감각적인’ 인터넷의 특징은 미디어 몹에서도 예외가 없다.

8월 15일 광복절 날 올린 포스트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미디어 몹과 미디어 정글 2군데를 합쳐도 클릭수가 100번이 안된다. 하지만 이미지 블로그에 실린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글과 함께 실린 사진에는 클릭수가 그 10배인  1000번이 넘는다.


내가 사진을 올릴 때는 블로그에 올리는 글의 성격이나 내용에 따라서 사진을 실으려고 노력한다. 글 읽기가 싫으면 사진만으로 대충 감(feeling)이라도 잡으라고....

또 이미지 블로그에 올리는 사진에도 블로그에 올리는 글 내용의  전부, 반 정도 , 1/3 정도와 함께 올리는 것도 인터넷의 특징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올린 사진을  클릭하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워싱턴 연설문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과 함께 실어 논 킹목사의 연설문 전문을 다 읽어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클릭하면 어쩔 수 없이(?) 제목이나 아니면 본문 중에서 몇 줄 정도는 읽어 볼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사진의 역할은 충분히 해 낸 것이다.


(3)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사실은 ‘검색사이트에서 자신의 글이 살아남으려면  글을 올릴 때 사진과 함께 올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6)번 질문을 읽어 보고는 모든 질문을 무시하려다가 6)번에 대한 나의 답변이 세계의 웹 문서 시장을 한번이라도 넘본 네티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미디어 몹에서 요구하는 10개의 질문에 분량이상의 답변을 해 주기로 생각을 고쳤다.  


웹 시장에서의 사진, 이미지를 함께 실어야 하는 이유는, 가령 전 세계의 웹 문서 시장에서  Diabetes(당뇨병)를 예로 든다면 (문서 / 이미지)

* Diabetes(당뇨병) - 31,500,000개 / 323,000

* Life of Diabetes(당뇨병인생) - 13,300,000 / 7,490

* Life of Diabetes -diabetic patients diet life - 987,000  / 9

  (당뇨병인생 - 당뇨병환자의 식생활)

* diabetic patients diet life(당뇨병환자의 식생활) - 596,000/ 6

* diabetic patients eye care. (당뇨병환자의 눈 관리) - 526,000 / 27

이런 숫자가 나온다.


6월 중순에 에  ‘야후코리아의 블로그’를 이용해서 내 홈페이지의 당뇨이야기(영문)를 10개로 나누어서 시험적으로 세계 웹 문서시장에 내 보낸 적이 있었다. 위에서 보듯이  제목을 Diabetes(당뇨병) 올리면 너무 광범위 해져서 웹 문서가  3천만 개가 넘는다. 그 당시 제목을 “diabetic patients lifestyle - diabetic patients eye care.”식으로 세분화 시켜서  올렸더니   이와 비슷한 웹 문서들이 110,000  정도였다.


내 글 중에  당뇨병이나 신학에 대한 글은 국내의 블로그나 세계의 웹 문서시장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글에 속한다. 당뇨병에 관한 카테고리를 세분화 시켜 ‘야후 코리아  블로그’를 통해 내 보낸 당뇨병에 관한 글 10개가 1-2주 뒤에는 몇 만 건이나 10만 건 정도의 웹 문서  시장에서는 5일 정도는 맨 앞면에 뜰 정도이다. 하지만 10만 건 정도의 세분화된 범주의 웹 문서에서도 글만 가지고는 맨 앞면에(10-15위 안) 오래있지를 못한다.


앞에서 예로 든 숫자에서 보듯이 글(문서)과 사진(이미지)의 비율이 너무 심하게  큰 차이가 난다. 문서만으로는 몇 만 건이나 10만 건 정도만 되어도 문서 검색 카테고리의 맨 앞에(적어도 20-30위 안에) 드는 것은 너무 어렵고, 또 올려져 있는 글조차도 그 자리에서  빨리 밀려난다.

하지만 사진(이미지)은 워낙 그 숫자가 미약해서 웹 문서 시장에 올려만  놓는다면  검색시장에서 무조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가 있다.


지난 6월 중순에 ‘야후 코리나 블로그’에 영문으로 된 당뇨병에 관한 글을 올릴 때도 세계의 검색시장의 특성을 고려해서 글과 함께 사진들도 올렸지만 글만 웹 시장에 등록 된 것 같다.

6월에 야후 블로그에만 영문으로 된 글과 사진을 올린 게 아니었다.

시험적으로 다른 곳의 블로그에도 몇 개씩은 올렸었는데, 내 글이 ‘야후 코리아 블로그’를 통해서만 세계 웹 문서 시장에서 잠깐이나마 유리한 자리를 차지 할 수가 있었다. 야후블로그의 웹문서 담당자가 그 때 사진까지 세계 웹 문서 시장에 올려 주는 안목을 가져야 하는데...


‘야후 코리아 블로그’ 뿐만이 아니고 대한민국 안에서는 유명세가 붙은 포탈 사이트의 대표자들이나 웹 문서 담당자들, 나에게 이 정도의 질문이나 하는 미디어 몹이나,...내가 올린 사진까지 웹 문서 시장에  올리는데 드는 비용을 나는 모른다(글조차도 올려주는지 안 올려주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내가 글과(특히 영문인 경우에는) 함께 올린 사진이 대한민국이 아니고 세계의 다른 곳에서  클릭 되는 순간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사이트는 내 홈페이지가 아니고 자기네 사업체라는 것까지도 사업구상에 두고 있어야 한다.

이쪽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컴퓨터나 인터넷을 10년, 아니면 그 이상으로 사용해 온 사람들로 알고 있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도무지...


- “사진(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해야만 전 세계의 검색시장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다.” - 1년 동안 외국의 사이트를 서핑 한 덕분에 2-3달에 한번씩 컴퓨터를 망가트려가면서 배운 인터넷의 또 다른 특징이다.


2)모 사이트의 짤방 (짤림방지)습관인가요?


다른 사이트에서는 잘린 적이 없음. 외국의 사이트에서 사진을 담아오기 시작한 것이 11월초였기에  작년 5월-7월까지 3달 동안에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는 사진들이 없었음.
내 블로그에  게시한 사진이 ‘선정성’이유로 처음으로 잘린 곳은 올해 7월 미디어 몹임.

미디어 몹에 ‘병과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글과 고통에 뒤틀리는 남성 조각의 정면사진을 실었는데, 이 조각사진이 잘렸음. 지금 미디어 몹에 실린 사진은 조각의 정면사진이 아니고 옆면사진임.

‘네이버’와 ‘야후’에서는 올해 6월에 잘리기는 잘렸어도 블로그에 게재된 사진이 잘린 게 아니고 ‘네이버’에서는 ‘네이버 포토- 다큐멘터리’에 올린 ‘전쟁에 대한 사진들’이 너무 자극적(?)이라 잘렸고, ‘야후’에서는 ‘재미 존 - 외국스타’ 에서지만, 이곳은 자극성이나 선정성이 아니고 내 홈페이지의 URL이 게재되었기에 잘린 것임.


야후의 블로그에서 7월에 <위반 사항 : 음란/음란 URL전송 ,위반 게시물 : 섹스(1) - 허리 부근을 수 없이 주물러라.> 메일을 받고 열이 받쳐서 블로그 담당자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더니, 음란물이 아니고 내 홈페이지 URL 게재한 것에 대한 신고가 들어와서,....라는 희한한 변명으로 된 정식 사과편지를  받은 적이 있음.

번역된 내 글들을  웹 시장에 내 보내기 위해서는 다른 곳의 블로그보다는 ‘야후코리아의 블로그’가 필요한데도 야후블로그 정책의 폐쇄성 덕분에 당분간 활동을 중지하고 있는 중이다.







7. '깡통인생, 깡통목사, 깡통문화, 그리고 섹스'라는 블로그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깡통을 돌림자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요?


‘깡통’이라는 단어가 느낌이 정형화 되고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기존의 질서에서 이탈한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듯해서 인생, 목사, 문화, 앞에 서식어로 사용했다. 3번을 쓴 것은 강조되는 효과를 높이려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가 아니고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의 용법이나 “내가 친구가 되어 줄께....” 아니고 “내가 내가 내가 친구가 되어 줄께....”라는 노랫말도 이와 비슷한 효과라고 생각한다. 


또 지금의 내 삶이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척도(?)를 기준으로 볼 때는 40대 중반의 한국인 / 남자 / 목사.... 모든 면에서 이탈된 상태이기도 하다.

다른 블로거들도 자신의 ‘아이디’나 ‘블로그명’을 지을 때 자신의 생각이나 생활을 가미하거나 숨기는 쪽으로 이름 짓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내 경우에는 ‘블로그명’이나 ‘아이디’에 자신의 삶을 드러낸 쪽이다.



8. 홈페이지가 아주 동적이면서 화려한 플래시로 시작화면이 장식되어 있는데 직접 제작한 것인가요? 울부짖는 자유인님의 컴퓨터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1)홈페이지가 아주 동적이면서 화려한 플래시로 시작화면이 장식되어 있는데 직접 제작한 것인가요?


내 홈페이지 www.mryoum.com  을 처음 개설하던 2002년에 5월까지는 컴퓨터는 켜고 끌줄도 몰랐고, 남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본적도 없었다.

2)번 ‘아이디’에 대한 질문에서 언급했듯이 ‘죽-기-전-에 내 삶을 토해내는 방법’으로 인터넷을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2002년 봄에 홈페이지를 만드는 사람에게 내 의도와 내 요구를 전달해서 만든 플래시이다.

지금의 홈페이지는 2004년 3월과 2005년 5월, 2번에 걸쳐서 업ㅡ시키는 작업을 한 홈페이지만, ‘플래시’ 만큼을 2002년 봄에 만든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울부짖는 자유인’의 이미지와 대충은 맞는 듯해서...)


2) 울부짖는 자유인님의 컴퓨터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난 컴퓨터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기술이나 상식조차도 없는 사람이다.

인슐린주사를 28년 동안 맞고 살아 온 중증의 당뇨병환자의 눈이라 컴퓨터 작업을 20-30분만해도 눈이 붉게 부어 올 정도로 눈 사정이 극도로 나쁘다.

이런 눈 사정으로 인해서 컴퓨터를 안 하면서 버텨왔었다. 하지만 내 사정이 컴퓨터작업을  안 하면 안 되는 상황(?)이 되서 뒤늦게 배운 사람이다.


E-mail 보내는 것도 2004년 5월에야 배웠고, E-mail과 함께 첨부파일 보내는 것을 확실하게 배운 것도 올해 4월중에야 배웠다.

‘새 폴더’ 만드는 것도 올해 4월에 홈페이지를 업-시킨 사람에게 배웠다. ‘내 눈 사정’으로 인해서 컴퓨터화면을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컴퓨터에 대해서는 ‘폴더 만들기’ 정도의 기본적인 기술에 대해서조차도 힘들어 할 때가 많다.

인터넷이나 블로그는 ‘...알면서 뛰어 든 세계가 아니고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하고 있는 인터넷작업과  블러그 활동’ 이라 실수의 연발이다.


다만 인터넷이 세계적으로  대중문화에 대한  공통된 분모 역할을 하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을 바에야, 컴퓨터에 대한 기초적인 기술획득보다는 인터넷이나  정보세계의 특성, 문화의 흐름....따위를 빨리 파악해서 내 실생활에 응용하고 있는 중이다.








9. 궁극적으로 블로그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이름값(?), 다른 말로 하면 ‘명예’를 얻어 보려고....

만약 질문자가 ‘블로그’를 지칭할 때  ‘미디어 몹’이나 ‘미디어 정글’ 만을 염두에 두고 이 질문을 했다면, 개인적으로 질문자에게 ‘우물 안의 개구리가 세상을 보는 눈’ 이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

그리고 6)의 질문과 그에 대한 내 답변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음.


28년을 인슐린 주사로 맞고 있는 중증의 당뇨병 환자로서 / 중증의 장애인으로서(?) / 목사로서 / 한국인으로서 우아한척하면서도  온갖 오만과 시건방 떨면서 비백인계에게는 끝없이 도도한 서구인들이나, 같은 아시아권에서조차도 남의 나라들을  깡그리 무시하기로 유명한 일본, 중국...

이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에도 이런 목사가 살고 있다,”는 똥고집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당뇨병 (I형, 인슐린 의존형) / 신장 / 관절 / 장애우 / 다이어트 / 신학 / 설교.....나만이 가지고  있는 나만의 독특한 생활방식이나 지혜나 지식을 가지고 CNN, BBC, NHK, CN... 방송국에서 그들보다도 더 잘난 척하며 시건방 떠는 내 얼굴을 클로즈 업 시키는 게 내 남은 인생의 목표이며 꿈이기도 하다.


밑의 글은 내 홈페이지의 ‘자화상’에 실린 글 중에서 9)질문과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아서 ‘자화상’의 일부를 인용해서 다시 만든 글임.


** 중증의 당뇨병 환자나, 진행성 만성질환으로 고생하는 환자들, 중증의 장애우,... 우리사회에서 아웃사이드로 살고 있거나, 살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내 몸 조건을 통해서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말은 햇볕이나 각종 빛들, 더위, 각종 열기구에 의한 난방, 빛, 습도,... 인슐린 주사 28년의 경력,...이런 악조건 위에다 인슐린 주사를 28년 동안 맞으면서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합병증들까지,...이와 같이 황당한 조건에서도 28년을 견뎌왔고, 앞으로도 5-10년을 더 견딜 수만 있다면, 황당하고도 희한한 이런 나의 삶이 다른 환자들에게는 분명히 ‘희망’이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내 홈페이지 www.mryoum.com  에 실은 글과 춤. 사진 .설교, 신학 사상-지난 28년 동안  몸으로 부딪치며 쌓아 온 경험이나 상처뿐만이 아니고, 머릿속의 고이고이 쌓아만 두었던 지식이나, 아직은 보여 줄만한(?)(!) 내 몸을 가지고서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당뇨병 환자들에게 나의 ‘온 몸으로 뿜어내고 있는 희망’을 눈으로 확인 시켜 주기 위한 작업이다.


  당뇨병 환자로서, 중증의 장애인으로서(?), 목사로서,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난 지금 내 삶을 남들에게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 보여주려고 한다.

여기서 남들이란 대한민국만이 아니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려는 천재적인, 그리고 천부적인 몽상가의  과대망상(?)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컴퓨터는 완전 컴맹을  겨우 벗어난 주제인데도 ‘지구촌 시대’, ‘글로벌 시대’라는 말에 걸맞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정보화된 세계와 인터넷 바다 위를 마음껏 날아보려고 발버둥치는 놈이 바로 ‘울부짖는 자유인’ Mr. 염의 2005년의 자화상이다.







10. 마지막으로 미디어 몹을 찾는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한 말씀은? 관심이 가는 미디어 몹 블로거가 있다면?


1)마지막으로 미디어 몹을 찾는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한 말씀은?


(1) 이 기회에 좋은 소리 한 가지를 더 하자면 지금도 몸 조건은 남들보다 뒤떨어지지만, 머릿속만큼은 꽉 차있는 또 다른 ‘울부짖는 자유인’들에게도 나의 황당,  멍텅,  대담무쌍,  천방지축....비현실적이고도 몽상가적인 돈키호테 같은 기질 덕분에 도서 출판 ‘울부짖는 자유인’의 탄생과 죽-지-않-고-살-아-서 시리즈도 출판할 수 있었고, 더 큰 세계를 맛보고 싶은 욕망으로 인터넷 속을 헤집고 다니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삶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 아직은 빠르지만 10대들에게 해 주는 말이다.(몹에도 10대 고객들이?...)

9)번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도 좋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목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하는 말이다.

허황된 꿈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있어야만 그 꿈이 이루어 질 가능성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지, 꿈조차도 꾸지 않는 자에게는 ‘그 눈곱만큼의 가능성조차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미 20대만 해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한국인특유의 고정관념이나 편견들’을  뛰어 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내가 바라보는 한국사회이다. 아직은 ‘천방지축의 10대 철부지’ 일수록 인터넷의 특징을 빨리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쓰는 글이다.


*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 ‘야망자체’보다는 ‘야망의 범위’와 그 ‘야망을 써 먹을 대상’을 제대로 선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세상은 좁고 할일은 많다(!)를 한 번 더 써 먹어라.

* 각 나라마다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며 누구에게나  open 된 사회를 주장하고 있지만, 평범한 국민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그나마 조금 열려있는 곳이 인터넷속이다.

인터넷 속에서는 - 내 보내고(팔고), 들여오고(사고) - 단 2가지 부류만이 존재한다. 이왕에 인터넷을 가지고 놀려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자기를 내 놓는(파는) 쪽으로 노는 것을 배우도록 하라.



                                             ....울부짖는자유인 염상명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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