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에 해당되는 글 76건

  1. 2008/06/29 ...번역 작업...할 말 좀 하고...
  2. 2007/12/31 총. 칼보다도 더 무서운 무기....
  3. 2007/11/30 ....인생의 흔적에 대하여
  4. 2007/10/30 네 멋대로 살아라!
  5. 2007/09/20 Dance with me!
  6. 2007/08/28 말이 씨가 된다.(1)
  7. 2007/08/28 말이 씨가 된다.(2)
  8. 2007/08/28 말이 씨가 된다.(3)
  9. 2007/07/15 3-‘아버지’라는 이름을 그리워하며,...(1)
  10. 2007/06/25 66. - 죽 · 지 · 않 · 고 · 살 · 아 · 서
  11. 2007/06/15 65.-남들한테 짐짝처럼 대접 받는 인생살이는 싫다.
  12. 2007/06/14 64.- 30년이라는 세월동안 간직해 온 경험, 상처, 지혜...
  13. 2007/05/30 63. -내 인생의 광기어린 육필원고...
  14. 2007/03/24 62.- 별 짓(?) 다해가며 살아 온 덕분에....
  15. 2007/03/23 61.- 춤 짱 목사의 생각들과 행동들 ...‘엽기’ 그 자체
  16. 2007/03/18 60. - 관절 퇴화의 지름길??
  17. 2007/02/20 59.- 미용사의 꿈과 ‘인류를 아름답게, 사회를 아름답게!’
  18. 2007/02/20 58. - 햇볕, 더위, 열, 스팀, 히터....끔찍한 인생살이
  19. 2007/01/10 57. - 부모자식간의 단절된 관계
  20. 2006/12/31 56.-‘단말마적인 허우적거림’으로 ‘지랄 발광을 떨 때....’
  21. 2006/12/31 55. - 성대 입학사건과 내 인생에서 가장 편했던 시간들...
  22. 2006/12/26 54.-사랑, 사랑, 사랑∼ ‘사랑’의 홍수 속에서 살지만....
  23. 2006/12/26 53. -모모는 꼬마 철부지. 나는 45살의 철부지.
  24. 2006/12/14 52. - 왜?.... 내 정체성에 대한 혼돈...
  25. 2006/12/06 51.- 발가락에 콘돔을 씌운 후에....
  26. 2006/12/05 50.-‘한 마리 새처럼’... 옷을 입지 않고 춤을 춘다!!
  27. 2006/11/30 49. -“x 주고도 뺨 맞는다.”는 속담처럼....
  28. 2006/11/29 48. - 내 지난날의 생활 방식....
  29. 2006/11/28 47. - 꼴사나운 ‘똥 폼’? ...쉽게 볼 수 있었던 풍경!
  30. 2006/11/23 46. - ‘내 인생의 휴식시간’
  31. 2006/11/22 45. - 용감무쌍한 기질...내 인생의 가장 큰 밑천
  32. 2006/11/22 44. -외모는 모델, 날라리....성격은 ‘외유내강’
  33. 2006/11/10 43. -누울 곳을 찾아 헤매며 보았던 학력고사....
  34. 2006/11/10 42. -학력고사 보는 날
  35. 2006/11/10 41.- 학력고사, 그리고 성대 조경과 82학번 입학!
  36. 2006/11/07 40.-1981,5월 후...영원한 민방위...영원한 인슐린 주사!
  37. 2006/11/07 39. -‘죽는 순간까지 간직해야 할’ 나만의 독기와 아집....
  38. 2006/11/06 38. - 왜? 왜? 왜?....
  39. 2006/11/06 37. -걷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40. 2006/11/06 36.-1980년11월, 당뇨병의 재발(?)
  41. 2006/10/31 35. - 내 페니스는 22개월 동안 ‘발기 한번 안됐다.’....
  42. 2006/10/31 34. RH-787음독 후 3달 정도가 경과한 후의 시간에는....
  43. 2006/10/23 33. - 1980년의 여름은 내 생애에 가장 편했던 여름!
  44. 2006/10/18 내가 살아가는 목적....'죽기 전에’ 작정하고 꼴값 좀(!) 떨어보려고....
  45. 2006/10/04 32. - .... ‘미친놈처럼’ 이라는 수식어!
  46. 2006/10/04 31. - 나의 화려한 인생살이와 찬란한 여름(?)
  47. 2006/09/29 30. - 나의 지겨운 ‘여름살이’
  48. 2006/09/27 29. -가난한 심장병환자들의 ‘열과의 싸움’
  49. 2006/09/21 28.....너무 뒤늦은 시간이지만....이제야....
  50. 2006/09/21 27. - 소태 같이 쓰디 쓴 책
  51. 2006/09/21 26....RH-787 음독 자들의 필수적인 삶의 조건....!
  52. 2006/09/20 25....환자의 자존심을 키워주라!
  53. 2006/09/20 24. 환자들에게 유용한 마사지 이론들....
  54. 2006/09/19 23...썸머 타임-Summer Time
  55. 2006/09/19 22. - 천의 얼굴, 천의 몸뚱이
  56. 2006/09/19 21....단장의 미아리 고개.... 애간장이 녹다!
  57. 2006/09/15 20. 밤이면 밤마다....똥 싼 놈 주제에 ...
  58. 2006/09/15 19. ...겨드랑이가 가렵기 시작했다....
  59. 2006/09/15 18. - 황당 엽기 발랄....그리고 보편성과 고정관념
  60. 2006/09/15 17. - 과제물 - 산다는 것?
  61. 2006/09/15 16. - 투쟁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
  62. 2006/09/15 15. - 미친....미친놈! - ‘crazy....crazy guy?’
  63. 2006/09/14 14. - 늙고, 병들고, 가난하고....사망 0순위
  64. 2006/09/14 13. - 심장에는 열이 완전히 독약....
  65. 2006/09/14 12. 부작용과 특이체질-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들....
  66. 2006/09/14 11.....딱 꼬집어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67. 2006/09/11 10. - 1978년 여름의 찜통더위!
  68. 2006/09/11 9....살아 날 것에 희망을 두지 말라...
  69. 2006/09/11 8. - 인간의 몸은 ‘사마귀’와 닮은 꼴?...
  70. 2006/09/07 7. ‘자위행위’-최고의 건강지킴이?....
  71. 2006/09/07 6.추락하는 것에도 날개가 있다??
  72. 2006/09/07 5.‘성기 발랄한 나이’의 ‘영원한 내 장난감(?)’을 기억하며...
  73. 2006/09/07 4.....끔찍할 정도의 멍에
  74. 2006/09/07 3. ‘투쟁’ 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삶의 연속
  75. 2006/09/07 2.시간 너머의 끔찍한 시절...의 그 시절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전부(?)
  76. 2006/09/07 1. 느낌이 있는 삶! -1977년 가을,

...번역 작업...할 말 좀 하고...

인생2./ Naked Life2. 2008/06/29 17:22






**기막힌 내 인생...할 말 좀 하고 죽겠다”고 시작한 번역 작업...



* ○○ 동생


* 사례비.... 지난 12일, 목요일 오후, 은행가는 김에 이번 달 사례비 입금....


* 이번에 보내는 설교는 수정된 2권7 뒷부분 17."당신이 잠든 밤에도..(기적은 일어나고 있다)"....동봉한 파일에 ....몇 번을 손 봤지만 한글 문서를 자세히 보면 시야의 정확도 대신 어른거림만....이번에 보내는 설교까지  3개의 설교번역이 끝나면 2권은 완성...적어도 올해 2008년 안으로 끝낼 수 있기를...이 정도의 성의는 가져주기를...(...동생이 어떤 일을 하든, 틈틈이 다른 글의 번역을 하든 상관없이...)


* 지금부터는 천천히 읽고 생각해 보기를 ...독기인지, 오기인지, 믿음인지, 신념인지....“...죽지 않고 살아서.... 기막힌 내 인생을 넓은 세상에서 할 말 좀 하고 죽겠다”고 시작한 번역 작업....이번 6월로서 꼬박 3년...번역량이 3년에 책 1권(1권의 번역량 포함).....


*인간관계, 돈 관계...모든 것이 너무 힘든2005년 5,6월에 시작된 동생과의 인간관계...그 때는 동생의 선처(?)가 너무 고마웠음...시간이 갈수록...고마움에서 짜증으로...인생을 살다보면 이득이 있을 수도 있고. 손해를 입을 수도 있고...한번 맺은 인간관계를 자기의 필요할 때마다  약삭빠르게 계산적으로 손익만을 따지는 성격은 아님....그렇더라도 시간이 갈수록....‘이렇게 막연하게 시작하는 게 아니고 대략 구체적으로 번역에 따른 조건들의 테두리를 정해놓고 시작하는 건데’ 하는 생각....







* 3년에 책 한권 번역....그동안 왼쪽 눈 2번...수술한 눈으로는 차량 번호판의 숫자조차도 정확히 식별 못하고...한글작업? 진짜 왕짜증...올 4월에 한 발목수술....2-3달 뒤에 5급 장애판단 받을 예정...77년이면 30년도 지난 긴긴 사간이지만 RH787 특유의 병리작용(독성)이 몸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는 몰라도....지난 3년 동안에 의사들이 처방했던 약물들마다 부작용이 나타나 시도 때도 없이 어지럽고....어지럼증이 심할 때는 외출은 물론이고 서 있기도 힘들 때가 있음...입원 할 때, 특히 수술 후에 나타나는 ‘인슐린저항성‘도 수술을 거듭할수록 심해지고 ...이번 수술직후에는 병원측에서 하루에 84단위까지 높여서 주사해도 하루 종일 고혈당...입원도중이나 퇴원 후에도...어떤 날은 하루에 3-4번이나 인슐린을 주사해도 거의 하루 종일 고혈당....그 반면에 어떤 날은 하루에 2번만 주사해도 한 밤중이나 새벽부터 저혈당일 심하게 오고,,,.참고로 2005년 12월 까지는 30-34단위를 1번, 2007년 4월 첫 번째 눈 수술 할 때까지는 대략 40-45단위정도를 2번, 지금은 45-55단위...심한 날은 하루에 4번이나 인슐린을 주사...

....또...또...


*...결국 ’시간과의 싸움‘  ’돈과의 싸움‘  ’자신과의 싸움‘ ...시간이 갈수록 이 모든 것들에....그나마 아주 조금 간직하고 있던  자신감마저도 없어져가고...하지만 끝까지 버텨내야만....치사하고 힘든 삶의 연속이더라도...힘들게 붙들고 버텨내야만 하는 ’생존‘이나 ’실존‘이라는 단어.....이부분이 남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나만의 믿음‘’종교적 가치관‘.... 


* 한번 맺은 동생과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번역의 속도를 부추기기 위해.... 적어도 이런 말들까지 쏟아낼 필요는 없는데도...남들은 물론이고 내 형제들까지 도 ‘미친 놈’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가며 살아 온 인생살이...나 이외의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은 가운데서 내 몸이 더 나빠지기 전에 작정한 번역작업까지 끝내자니... 내 글들이 번역이 끝냈다고 해서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장담도 못하지만...빛을 못보고 애만 쓰다 끝낼 가능성이 더 커도....또 매끄럽고, 호감가고, 유독 잘 쓴 글은 아니지만...그래도 시작한 작업...일단 번역이 끝낸 원고는 가지고 있어야...스스로의 위안감.....

...죽을 때 죽더라도.....‘희망’을 가지고 싶다!!....


*동생이 내 글의 번역에 최선을 다해서 매달려 주기를 바라며 다소 무거운 ...

...그리고  시간을 낼 수 있으면 동생의 얼굴을 보고서 말을 해 보고 싶은데...



* 건강....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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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칼보다도 더 무서운 무기....

인생1./ Naked Life1. 2007/12/31 11:41






6. 스트레스와 홧병 1.



- 스트레스가 총. 칼보다도 더 무서운 살인무기가 된다.



내 인생에 있어서 2번째로 힘들었던 2001년에서 2004년, 특히  2001년 여름은 신인돈목사와의 트러블과 최영철의 삼성카드 보증인으로서 최영철의 삼성카드 채무 빚 문제로 화병에 시달리는 것이  화근이 되어 온 몸이 붓고, 심한 냄새가 나는 오줌을 누던 때였다.


그때까지는 맘 좋은 후배로 생각하면서 10년을 가깝게 지내왔던 진용석까지도 그 기막힌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아니면 내 카드를 도깨비 방망이나 요술 방망이 정도로 여겼는지 모르지만 자기에게 돈이 필요할 때마다 찾아와서 낮이고, 밤이고,1주일이고,2주일이고,... 심지어는 1달이고 2달이고 끈질기게 찾아오면서 “...돈 좀 꾸어 달라”면서 무조건 떼를 쓰곤 했다.


2001년 10월과 11월,12월에는 내가 사는 아파트로, 2002년 2월과 3월에는 교회로 찾아왔다. 욕도 하고, 야단도 치고, 큰소리도 쳐 보았지만 그 앞에서는 헛수고였다.

부탁을 거절하면 해 줄 때 까지 떼를 쓰는 통에 욕하고, 야단치고, 큰소리치는 바람에, 가뜩이나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만도 지겨운 마당에, 주위 사람들한테 나를 완전히 이상한 놈으로 각인시키는데 한 몫 거둔 인물(?)이 진용석이다. 결국은 그에게 2001-2002년에 해준 돈을  2007년 2월까지 카드 돌려 막기로 버티고 버텼는데....

2007년 2월 현재, 진용석이 나한테 가져올 카드 빚이 원금과 이자 합치면 1800만원정도이거나 그 액수를 웃도는 돈이 될 것이다.





2001년 늦가을에는 2000년부터 시작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서 몸이 엄청나게 부은 상태로 힘들게 살아야만 했는데, 그 때도 교회로 찾아와서 내 카드를 이용해서 돈 좀 쓰자고 억지를 부렸다.

그 날은 부어서 힘든 몸으로 교회벽면에 글씨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나를 도와서 글자를 붙이거나 아니면 내가 글씨를 붙이기 위해서 올라간  의자라도 붙잡아 주었으면 좋으련만, 의자조차도 붙들어주지 않고 교회장의자에 앉아서 “돈 꾸어 달라”는 소리만 되풀이 하면서 억지를 부리는 그에게 짜증을 내고, 큰 소리로 욕을 하다가 나중에는 양발을 벗어서 퉁퉁 부은 발을 그의 눈앞으로 보여주었다.

퉁퉁 부은 발까지도 보여주었는데도 내 몸이 심하게 부은 것은 그에게는 안중에도 없고 여전히 돈만 빌려달라고 떼를 썼다. 10살짜리 초등학생이라도 그날의 그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눈과 귀는 없고, 입만 있는 희한한 인형과 말을 하는 꼴이다.


그 날은 2시간씩이나 억지를 부려도 내가 응해주지 않자 교회를 나가면서 내던지는 말이 “남들이 형을 보고 싸이코래!”- 이 정도면 완전히‘예술수준’일 것이다. 나중에 이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자, “다 형을 생각하고, 형 교회를 생각해서 해 주는 소리”란다.

나를 2번만 생각해 주었다가는 사람을 ‘생 송장’으로 만들 놈들이다.


그리고 ‘그 남들’이란 인물은 보험설계사 하는 자기 친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돈 빌려 달라고 떼를 쓰는 그에게 ‘잘난 네 친구들한테 가서 돈 이야기 하라’ 고 하면 자존심이나 체면을 운운하니, 나 보고 살라고 하는 것인지 빨리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는 것인지 분간도 안갈 정도이다.





그동안에 최영철은 최영철대로 TV에 출연해서 (2001년11월, 지금은 없어진 ‘장밋빛 인생’) 자기만 살겠다고 거짓말이나 하고, 진용석은 진용석대로 돈 필요하면 찾아와서 돈 빌려달라고 억지를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2001년 늦가을부터는 2000만원이 넘는 ‘트라젠’ 의 보증까지도 서 달라고 2달 동안이나 억지 부리고, 돈 필요하면 찾아와서 돈 빌려달라고  떼쓰고,...그것도 자기 외삼촌과 사업을 할 것이라면서 나는 알지도 못하는 자기 외삼촌 명의로 뽑는 차에 보증서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진용석의 외삼촌- 즉 그의 어머니 형제는 9남매이다. 9남매를 제쳐두고 그의 외삼촌과는 생면부지인 나에게 보증을 서 달라고 무조건 떼를 쓰니...더구나 그 당시 그의 외삼촌은 신용불량자였다.)

차 보증은 서 줄 수가 없었다.


2달 이상을 매 달려도 끝까지 차 보증을 안 서 주자, 한신대 앞에서 생맥주를 마시다가 기껏 한다는 소리가

“형과 형 교회를 생각해서 제안하는 건데, 형이 차 보증을 서 주면 둘째 외삼촌을 형 교회에 출석시키도록 외삼촌을 설득시킬 테니까 보증 좀 서주라...” 는 기막힌 소리를 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야, 이 미친놈아 ,내가 아무리 힘들게 교회를 하고 있고 ,교인이 없어서 환장을 하더라도, 너 같은 놈들한테 이런 소리나 들어가면서 네놈들한테 교회 나와 달라는 소리는 안 한다. 아예 교회 문을 닫게 되면 닫고 말지....이 미친놈아! 입으로는 온갖 좋은 종교정신과 윤리는 다 주워 담으면서 이걸 말이라고 하냐!”

하면서 생맥주를 마시다 말고 생맥주집을 나온 적이 있었다.

만약에 그때 그의 끈질김과 인내에 굴복해서 차 보증까지 서 주었더라면, 지금쯤은 나 역시도 신용불량자로 되었거나, 더 이상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가면서까지 구차하게 사는 것이 싫어서 자살이라도 할 판국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진용석이 나에게 와서 돈 문제로 억지를 쓸 때마다 “이런 일은 내가 아니고 네 부모님이 할 일이고, 네 부모님이 책임 질 일이다.” 라고 수없이 짜증을 내다가 나중에는 “이 미친놈아, 너 ,나 사는 것은 보이지도 않냐? 나 지금 돈 없는 것 뻔히 알면서 계속 개소리만 할래! 너 지금 독이 올라서 몸까지 망가지고 있는 게 내 꼴이 네 눈에는 보이지도 않니, 미친놈들아” 라고 욕까지 하면 “우리 집 지금 돈 없어서,...우리 엄마도 돈 없어” 하면서 엄청 효자소리만 골라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팔자에도 없는 효자 덕에 나만 더 죽을 맛으로 살아야 하니.... 내가 자기 친 어머니나 되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떼를 쓴 곤 했다.

내 쪽에서도 수 없이 짜증은 내봤지만, 짜증 그 자체로 끝난 덕에 진용석한테만 건너 올 돈만해도 1800만원 정도의 거금이 되었으니...





진용석이 다른 사람들한테는 체면이나 자존심을 운운하면서 유독이 나에게만 별별 희한한 소리까지 해 가면서 억지를 부렸었던 행동 뒤에는, 내 평생을 따라다니는 나만의 특수하면서도 희한한 몸 사정이나 지나치게 화려한 병력을 지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독하게 마음을 먹어도 일상중의 일부분은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더구나 운전도 못하고 그 때까지는 당뇨병환자의 끝을 생각해서 완전 ‘컴맹’으로 살았었다.( 중증의 당뇨병환자들이 말년에 시력을 잃거나 발을 절단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책을 쓰기 시작한 2002년 여름까지도 컴퓨터에 파일을 입력하거나 입력된 파일을 출력하는 작업도 못 했었다. E-mail을 보내는 것도 2004년 5월에서야 배웠다.)


내 형편이 이렇다보니 그에게 사소한 부탁을 할 입장까지 겹쳐져야 했는데-그는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완강히 부인했지만-몇 번은 나에게 드러내 놓고 생색을 낸 적이 있었다.

그들과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내가 자기들을 도와 준 것들은 모른체하고 자기들이 나를 도와주는 것만을 ‘무기로 삼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곤 했다. 내 살아가는 상황이 이렇다보니 필요이상으로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입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안고 가는 “인생살이”이다.





지금도 내가 힘들게 쓴 <아직도 살고 싶다> 와 <구원자, 숨어 게신 하나님이시여>를 신문광고로 내 보낼 돈이 있거나, 내 옆에서 나를 성의껏 도와줄 단 한명만 있어도, 인슐린주사를 30년째 맞으면서 살고 있는 중증의 당뇨병(?)환자인 내 입장을 고려해서, 또 내 눈을 생각해서라도-2007년 한 해 동안에  왼쪽 눈은 망막을 건드리는 수술을 2번이나 했다- 컴퓨터작업은 중단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최후의 돌파구로 생각하고 발버둥을 치면서 마지막으로 뛰어든 것이 2004년 여름부터 시작한 인터넷세계이다.

<아직도 살고 싶다> 의 내용에서 당뇨병환자라면 뒷날을 생각해서 운전이나 컴퓨터, TV시청,... 따위는 ‘피 할 수만 있으면 피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30년을 당뇨병환자로 살아오면서 운전이나 컴퓨터를 못해서 내 인생이 더 힘들고 ,더 지겹게 꼬였는데도 다른 당뇨병환자, 그중에서도 소아당뇨병환자들에게 한 “...무조건 컴퓨터를 하지 말라” 는 나의 말이 얼마나 심각한 말인지를 소아당뇨병 부모들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특히 소아당뇨병을 앓는 어린 당뇨병환자라면 20년,30년,...뒷날을 생각해서 무조건 컴퓨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써 났다.

막말로 소아당뇨병환자들이 ‘컴맹’ 이 되어서 나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죽는 날까지는 “사물을 보고, 식별할 수 있는 시력까지는 간직한 상태에서 죽으라.”는 기막힌 (?) 염려이며, 충고이다.


그런대도 나 자신은 뒤늦게 인터넷 세계에 뛰어 들고 있는 중이다.

이 말은 현재의 내 입장이 이 정도로 힘들고 ,다른 돌파구가 없음을 뜻한다.

2000년 1월 이후에 진용석은 자기가 돈 급하면 내 카드 쓰자는 소리나 하고, 최영철은 나한테만 밀어 놓으면 자기 카드 빚이 저절로 해결 되는 줄 알고, 2000년 5월 삼성카드 카드 빚1390만원을 떠넘긴 것만도 모자라서 2003년 6월에 그의 부인이 임신해 배부른 몸으로 사정사정하면서 하는 부탁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들어주었다가 2003년 가을에 또 카드 현금 서비스로 400만원 만들어 보내준 것도 당하고,...지금 같으면 임신 8개월이 아니라 출산한지 8일 밖에 안 되는 핏덩어리를 안고 와서 사정해도 외면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 밖에 다른 목사 1, 2명도...자기들 때문에 내 인생이 꼬꾸라질 지경으로 꼬였는데도 “...미안 하다”는 말 한마디 안하면서 자기들만 ‘점잖고 우아한’ 목사인 줄 착각하고,..





나 진짜 모르겠다.

내 사정을 아는 그들이 ‘나하고 가깝고, 내가 편해서’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진짜 ‘마음 좋은 허수아비’쯤 으로 보이는 것이지 분간도 못하겠다.

2000년 이후로는 내가 그렇게까지 힘들게 버티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자기들이 필요한 할 말만 했다.

자기들한테 짜증내는 나는 희한한 성격이고, 내 인생 자체를 뒤엉키게 만드는 자기들은 인격이 다듬어진 사람들이라는 말까지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한술 더 떠서 큰소리치고 “지랄 발광하는 나는 인격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고, 자기는 인격적으로 다듬어져서 점잖게 애기 한다” 는 ‘진짜 개소리’같은 말까지 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이 지경으로 주체 못 할 스트레스로 인해서 몸까지 망가지면서 살았다. 당뇨병을 오래 앓을수록 말초신경이나 미세한 혈관들이 망가지는 현상은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망가지는 필연적인 현상보다는 지난 몇 년 동안은 ‘이웃이라고 믿어 왔었던 사람들’에게 받은 인간적인 상처와 그 상처들로 인해서 생긴 스트레스의 영향이 더 컸다.

2003년 12월에 실시한 건강진단에서 ‘신장에 이상이 왔다’ 고 통보를 받았다. 만약에 지난 몇 년 동안에 받은 스트레스로 신장에 더 큰 이상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나 혼자서 짊어져야 할 짐으로 다가 왔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망가지는 부위는 비단 신장뿐만이 아니다.

심장, 눈, 신장,...혈당, 혈압까지 조절이 잘 안될 정도로 온 몸 전체가 심하게 망가지게 되어 있다. 


또 이 사실을 최영철이나 진용석 그리고 나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수 없이 알려 주었어도 결국에는 최영철이나 진용석이 자기들 때문에 독이 바짝 올라있는 나한테 마지막까지도 “신용불량에 걸리더라도 같이 걸리고, 죽더라도 같이 죽자” 아니면“자기들이 살 테니까 나보고 죽으라.“ 는 양심도, 체면도 없는 소리까지 하면서 나를 물고 늘어 질 때도 혼자서 분통만 터트리며 버텨 왔다.


나뿐만이 아니고 흔히 ‘성인병’ 이라고 불리는 ‘진행성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들에게 장시간의 스트레스는 환자들의 몸을 형편없이 악화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기회에 한 마디 더 하자면 장기간 투병중인 환자에게 있어서 심한 “스트레스는 총, 칼, 독약 더 무서운 살인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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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흔적에 대하여

인생2./ Naked Life2. 2007/11/30 10:19





지난날의 삶1....Why! Why! Why!....아직도 진행형!(ing!)....



1.

최영철,,,,최영철을 10년 넘게 알고 지내왔지만 지금까지도 그의 나이와 전과기록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호적상 53년 생, 본인의 추측으로는 56.57년 생, 그리고 2001년 11월 말 KBS 2TV ‘장밋빛 인생’에 출연해서는 59년 생으로 자신의 나이를 밝혔다.

93년부터 2001년 11월까지는 그의 나이를 56,57년 생으로 알고 지내왔다.


지난 몇 년 동안 몇 개의 사건이 한꺼번에 겹쳐져 산다는 것 자체에 독이 올라서 으르렁거리며 살아왔다. 몇 개의 사건들 가운데서도 최영철이 남긴 상처로 인해 마음고생, 몸 고생, 돈 고생을 크게 하게 했던 장본인이다. 


최영철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93년 4월부터이고, 직접 만나 본 것은 그가 청송 교도소를 출소한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 졌다.


내 성격상 지난 일을 들추는 성격이 아니기에 대충 어린 시절부터 교도소를 드나들기 시작해서 삼청교육대에서 2번이나 교육 받고, 청송 교도소에 2번이나 수감되었다는 것 정도이지, 어떤 죄목으로, 전과 몇 범을 기록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다. 지나치게 화려한(?) 인생 경력을 지녔다는 것 정도로 알고 지내 왔다.


‘지내왔다’ 가 지금부터 쓸 내용이다.

....


2.

최영철이 2번째로 청송 교도소에 수감되기 전에 서울 구치소에서부터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을 찾아 수감 전에 인연이 있었던 서목사님에게 4통의 편지를 부쳤다. 서울 구치소에 보낸 4통의 편지는 내가 간직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없앴다.


이때가 서목사님 내외분한테도 가장 힘든 시기였기에 도움을 청하는 최영철한테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나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당시 신대원을 합격하고 휴학 상태에서 책이나 보고 내 몸이나 관리하면서 신학적 “의”를 생각하며 지내던 나에게 특별한 설명도 없이, 교도소에 있는 사람과 편지로 사귀어 보라는 사모님의 권면에 선뜩 응했다.

내 이름도 모르는 최영철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와 인연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오늘까지 왔으니, 그와의 인연이 10년 넘는 긴 시간동안 이어져온 것이다.






3.

1993년 4월부터 1997년 2월까지 내 쪽에서 190통이 넘는 편지와 소포를 보냈다. 최영철도 비슷하게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나에게 보낸 186통의 편지와 서목사님에게 보낸 2통의 편지를 합쳐서 최영철이 나에게 보낸 188통의 편지를 가지고 있다.


후일 여건이 허락 된다면 나와 최영철 사이에 오고 간 편지를, 내용이 유치하더라도 내용 바꾸지 않고 편지-답장 형식의 책으로 만들고 싶다.



4.

93년 4월 이후 그에게 생일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감성어린 선물을 몇 번 보냈다.


한번은 만화 그리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1년 12달을 상징하는 12장의 그림을 그리게 한 다음, 그림들을 코팅하고 연결고리로 연결해서 보냈는데, -그곳 규칙상 코팅 된 그림은 수감자에게 납입 할 수 없는 물건이어서 ― 그림들을 보기는 했어도 받아 보지는 못했다고는 사실을 출소 후에 밝혔다.

이런 소포가 몇 개 된다.


또 ‘괜히 고상한 척 해탈한 척하며 의욕도, 욕심도 없이, 모든 것에  감사하다’ 는 식 의 그의 편지를 읽고, 당시에 유명했던 “쇼 생크 탈출” 이라는 영화를 예로 들어-살 만한 몸을 가지고, ‘성기 발랄한 몸뚱이’가 허락 될 때-사는 것에 대한 의욕이 남아 있을 때에 출소해서 아직 남은 인생을 ‘남들처럼, 사람답게 살라’는 식의 편지도 몇 번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런 내용의 편지들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사실은 그가 출소한 97년 2월 이후에야 안 사실이다.


 




5.

만 4년 동안 서로가 190여 통의 편지들을 보냈는데도 그때까지 그의 얼굴을 몰랐다.


내 쪽에서는 편지 이외에도 몇 번의 소포와 내 사진을 보내서, 그는 나에 대한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릴 수 있게 했지만, 최영철은 나에게 일부러 자신의 사진을 안 보냈다. 자신의 인생 중에 가장 초라한 시절의 모습을 진심을 보여 가며 자신을 사람대접 해 주는 나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또 청송교도소로 면회 가는 것이 내 몸으로는 너무 힘든 일이더라도 한 번은 가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면회 갈려는 나의 생각을 편지 속에서 읽고는 극구 밀리는 답장이 왔다.

그 이유를 그가 출소한 뒤에야 알았다.


나와 편지로 오래 기간 사귀다 보니 내가 몸도 아프고, 성깔도 대단하고, 그 반면에 의외로 순진하고, 그런 곳의 사정은 아예 백지 상태인 것을 알기에 면회 간다는 내 편지를 읽고는 오히려 뜨끔했다고 한다.


내가 그 곳 사정을 모르는 것이 뻔한데 그곳 사정을 편지로는 알릴 수가 없던 게 그때의 상황이었다. 당시 그의 별명이 ‘딱 통’이라고 했다. 이 말이 도살하기 위한 살진 숫돼지라는 것도 나중에야 그에게서 들었다.


형편없어진 자신의 외모를 보이기도 싫고, 또 내가 면회를 올 때 자신에게만 필요한 것들만 사 가지고 올 것이고, 그러면 자기는 그곳에서 진짜 따돌림 ― 왕 따 ― 를 당한다는 것도 출소 후에야 말해 주었다.


청송 교도소의 보이지 않는 규칙 중 하나가 재소자에게 면회가 오고 먹을 것이 반입되면, 일부는 상납되고 나머지는 같은 방 재소자들 전원이 나눠 먹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내가 면회를 간다는 편지를 할 때까지도 이런 사실을 몰랐었다.


대학시절 수원교도소에 단기간 수감 중이던 고향 선배를 빈손으로 면회 갔던 것이 내가 경험한 교도소에 대한 전부였다. 청송처럼 오랜 시간 수감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실상을 들어 본적도 없었다. 수원 교도소에 고향 선배를 면회 갔을 때도 빈손으로 갔지만, 다른 사람들도 면회 갈 때, 돈 얼마, 그리고 먹을 것 조금, 내복 정도를 가지고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청송교도소의 불문율은 ?앞에서 말했듯이 ? 일부는 상납하고(?) 나머지는 나눠먹는, 가장 바람직한 ‘재분배’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사과를 가지고 간다면 대형 박스로 1박스 이상, 떡을 가지고 간다면 1말 이상의 떡,..... 이런 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가 면회 할 재소자의 몫(?)만 가지고 간다면, 그 재소자는 면회 후에 완전히 ‘왕 따’ 취급을 당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남들이 면회 올 때 마다 얻어먹었는데, 자기 면회 올 때는 ‘혼자 먹고 입 닦은 꼴’이니.... 그가 면회 오는 것을 극구 말릴 만도 했다.


만약 돈으로 가지고 가더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몇 십 만원은 되어야 그 곳에서 많은 물건을 사서 그 물건을 다시 그 재분배 할 수 있지, 서너 개의 물건만 사게 된다면 그것을 누가 가질 것인가...... 이 정도가 안 되면 아예 면회를 오지 않는 게 낫다고 한다.

또 먹을 것을 가지고 갈 때도―옛날 교도소처럼―배고파서 아무거나 덥썩 거리며 먹던 시절이 아니기에 신경을 써서 먹을거리를 준비해 가야 된다는 것이다.


내 친구나, 내 가족, 가까운 친척 중에 청송 교도소는커녕 일반 교도소에 조차도 장기간 수감된 사람들이 없다 보니, 출소 후 최영철이 하는 말을 듣고서야 그때서야 그곳의 형편을 알았고, 또 이해가 됐다.

나뿐만 아니고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4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어도 그의 얼굴을 몰랐다.



6.

청송 교도소 출신의 최영철과 또 다른 1명을 깊이 사귀면서 청송 교도소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된 사실들 중에 하나는, 아직까지 우리사회에서는 금기시된 ‘동성간의 섹스’와 교도소직원들의 비리였다.


청송 교도소는  교도소중에서도 특수한 교도소였다.

청송 교도소수감자들은  5년-7년이 형을 살게 되어 있다. 정확하게는 7년이 조금 못되는 시점에서 출소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종교적인 수도생활이 아닌 사람들이 5-7년, 이 긴 시간 동안에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그들 나름대로 적절하게 해소하고 있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아직도 이런 부분을 깊이 다루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돈의 위력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도 청송 교도소라는 사실이었다.

보통의 재소자들인 경우에는 1달 노역의 품값이 고작 몇 만원인데, 그 곳에서 비밀리에 거래되는 담배 1개비의 가격이 1-2만원이란다.

이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몇 단계가 개입된다는 사실도....


청송 교도소와 삼청교육대는 80년대 초 5공화국 때 악명을 떨치던 곳이었는데, 앞으로 25년 뒤에는 이 모든 일들이 “쇼 생크 탈출”처럼 전설로 남아 있게 될 것 같다. 






7.

95년 대입 검정고시에 재차 응시하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오고 나서부터 그의 편지 속에 시험 준비.결심.불안.초조.긴장.기도.최선...등의 단어들이 눈에 띄게 많아 졌다.  대입 검정고시 시험을 앞두고는 그가 들떠있다는 느낌을  편지을 통해서 느껴지곤 했다.


그 때 내가 보낸 편지 중에 “난, 최영철이란 인간을 선입감 없이 사귀고 있는 것이다. 형제님이 이번 검정고시에서 올 백 점을 맞건, 전국 수석을 하건, 떨어지건, 지금의 사귐에는 변함이 없다” 식의 답장을 보낸 적이 있다.


시험을 치룬 뒤 “한 문제를 실수 한 것 같아 걱정은 되지만 만족할만한 시험을 치렀다. 담담하게 결과를 기다리겠다.” 내용의 편지가 왔다.

시험 결과는 그가 바라던 대로 전 과목 100점으로 전국 수석이었다.



8.

최영철의 95년 대입 검정고시에서 전 과목 100점으로 전국 수석 합격의 쾌거는 대입 검정고시를 2번 합격한 결과였다. 최영철이 비록 좋지 않은 쪽으로 화려한 경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의지와 집념을 가지고 자기 일을 추진해 나갈 줄 아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내가 알기로는 청송 교도소 첫 번째 수감 중에 대입 검정고시를 97점 아니면 97.5로 합격해서 경상북도 수석 합격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청송 교도소에 두 번째 수감 중에 대입 검정고시를 본인이 원한다면 다시 볼 수 있고, 먼저 번 점수 대신 나중 점수로 대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본 다음 남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독방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한다. 그 안에서 오랜 기간을 하루에 4시간 정도의 잠만 자면서 전 과목 100점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


나의 80년 5월의 대입 검정고시 합격점수가 평균 62.5아니면 63.5와 비교해 보면 그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는 쉽게 알게 된다.






9.

96년 말부터 출소하면 꼭 찾아뵙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몇 번 오고 난 뒤 97년 2월 말에 내가 살던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의 전셋집을 찾아오기 위해 성대 앞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그 날 조카와 다른 1명을 과외공부 시키던 때라, 전화를 받고는 조카와 조카친구를 일찍 보내고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편지 속에다 대충 자신들의 외모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어서 첫 대면이면서도 서로 특징 있는 외모(?) 덕에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최영철이 나를 처음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내 편지를 읽고 머리 속으로 생각하던 내 몸보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몸이 훨씬 더 건강하다는 것이다.

그때는 2월 말이었다.


내 몸의 특성상 10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는 당뇨병으로 인해 인슐린 주사를 맞고 합병증 관리에 주의만 하면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까지는 그가 미쳐 생각해 내지 못했다. 편지에 내 몸의 특성을 자세히 밝혔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몸 이상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던 것이다.


2번째로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내 식사습관 때문이었다.

그와 처음으로 대면하고 첫 식사를 내 집에서, 내가 직접 만들어, 내 방식대로 했다. 내가 차린 저녁식사를 보고 그가 “...이렇게 먹고 사느냐?”고 반문하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가 “....이렇게 먹고 사느냐?”고 반문할 정도로 가볍게 먹고 사는 게 내 식사 습관이다. 보통 하루 3번 식사에서 2번은 빵, 떡, 과일, 고구마 , 감자, 커피, 우유, 주스, 맥주(그 당시는 마주앙).....등 보통 사람들이 간식정도로 생각하는 먹을거리들로 2끼 식사를 해결하고 산다. 더구나 혼자 살다 보니 밥상이나 식탁이 있어도 바닥에서 적당히 먹을 때가 많은데, 남들이 볼 때는 황당한 식사 습관일 것이다.

최영철 눈에도 황당하게 보였나 보다.

그래도 그날은 밥도 하고, 냉장고를 뒤져 약병아리로 백숙도 만들었다.


반찬이라고 김치와 한두 가지 밑반찬 밖에 없고, 방바닥에 신문지 깔아 놓고 그 위에 밥, 반찬 등을 모양새 없는 그릇에 담아 놓고 “밥 먹자”는 내 말과 내 태도에 오히려 그 쪽에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날은 평소에는 안 하던 식사기도까지 해 가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해준 저녁식사 이었는데...

밥을 먹으며 내 이런 식사는 자신들이 생활하던 청송교도소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식사라고 했다.


“사람을 빵만으로 살수 없다”,,,,

그때는 이 말을 생각해 내지 못했는데 시간이 흐르다보니 이 말이 떠오른다.






10.

여기서 최영철에 대해서 몇 가지 부연 설명을 하고 싶다.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의지가 강하고 자신과도 싸울 줄 안다고 밝혔다.


그가 97년 2월 말에 출소하고 4월 20일 경까지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구경하면서 서각 학원과 학사고시를 위해서 덕성 여대 부설의 평생교육원에 다녔다. 그리고 4월 20일경에 먹고 살기 위해 택시회사에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단지 전과자라는 이유로 19군데의 택시회사에서 퇴짜를 맞았다.


교도소에서는 대입 검정고시에서 ‘전 과목 만점’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전국 수석을 하고 매스컴에서도 관심을 보였지만, 출소 한 후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차갑기만 했다. 특별한 직업도 아니고 택시 운전을 택했어도, 택시 회사마다 그를 거절했다. 그가 19 곳의 택시회사에서 퇴짜를 맞은 것을 말하는 동안 젖어 가는 그의 눈을 보니 그의 인생이 너무 처량해 보였다.


내가 그를 본격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1.

.....

8월이 이렇게 지나고 9월이 오고 찬바람이 돌 무렵, 새벽에 자기가 운전하는 택시를 몰고 그가 찾아 왔다.,

가톨릭 사회복지분과 위원회 쪽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가톨릭 사회복지 분과 위원회 (가톨릭 교정사목 위원회) 쪽에서 최영철이 97년 2월 출소한 후에도 열심히 사는 것을 7개월 정도 지켜보고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가톨릭 쪽의 연락을 받고 ‘개신교(교회)쪽에 남아 있느냐’, ‘가톨릭(성당) 쪽으로 가느냐?’ 의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고 이른 새벽에 나한테까지 온 것이다.


그 정도로 마음이 어린 면이 있었고, 또 그 때는 이미 목사세계에 대해서 실망을 한 시기이기도 했다. 청송 교도소에서 보낸 편지 중에는 가톨릭이나, 신부에 대한 언급은 없어도 교회나 목사에 대한 언급은 몇 번 있었다.


그날 새벽에 나에게 온 이유를 정리해 보면

첫째, 그의 마음이 어린 면이 있어서

둘째, 개신교(목사)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셋째는 그의 앞날을 생각 할 때 ‘과연 어느 쪽이 끝까지 도움을 줄 것인가’ 이었다.

그의 고민을 듣고 마지막 항목에 맞춰서 그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혼혈 고아, 불행한 어린시절, 화려한 전과 기록, 교도소에서의 ‘검정고시 전 과목 만점’이라는 성과, 그리고 출소 후에 힘들게  버텨내는 당시의 그의 생활태도.... 등을 망라할 때 가톨릭 사회복지 분과 위원회(교정사목 위원회)에서는 최영철이 가톨릭 사회복지의 프로그램의 하나인 ‘사회화’ 교육의 가장 적합한 본보기 인물로 지목된 것으로 해석했다.


나는 처음부터 그를 개인 대 개인으로서 사귀었지만 가톨릭 쪽에서는 달랐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 단체와, 최영철 뒤에 있는 ‘최영철과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의 대표자’로서 만난 것이다. 물론 쌍방합의에 이루어진 조건이나 계약보다는 가톨릭 사회복지 분과 위원회의 일방적인 후원과 교육이 주 내용이지만은, 이런 부분이 나와 가톨릭과의 차이점이었다.



12.

.....

99년 9월 그의 결혼 때까지는 가톨릭 쪽에서 적극적으로 그를 도왔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가톨릭 사회복지분과 위원회에서는 최영철을 지목했을 때 최영철 개인이 아니고 그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집단의 대표자’ 최영철 이었다.


물론 97.98.99년까지 가톨릭 내에서도 최영철과 개인적으로 친했던 사람들도 있고, 또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도와준 사람은 있었다. 그래도 가톨릭과 최영철과의 관계는 집단과 개인이 아니고 집단과 집단의 대표관계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그가 가톨릭 사회 복지 분과 위원회 산하의 ‘나눔의 집’에서 근무한 것도, 97년 ‘이것이 인생이다’와 그 후에 1.2번 다른 방송에 출연 한 것도, 또 ‘대한민국 서각 대전’에 그의 작품들을 출품 할 수 있게 후원해 준 것도, 99년 9월의 결혼도, 여기까지는 가톨릭의 의도에 별 마찰 없이 순응하며 지냈다. 그가 강원도 영월의 초등학교를 임대하고서부터 가톨릭과 큰 마찰이 일어났다.


최영철이 초등학교의 임대권을 받게 된 경위에도 가톨릭의 후원이 컸다.

가톨릭에서는 최영철 개인보다 최영철 뒤에 있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생각했기에, 초등학교를 임대한 다음의 계획까지도 가톨릭 쪽의 의견에 따르기를 바랐었다.

앞에서 한 말과 중복되는 부분이지만 이 부분에서 나와 가톨릭이 달랐다.




13.

내가 최영철을 사귀기 시작한 것은 93년이고 직접만난 것은 97년, 우리나라 나이로 34과 38살 때였다. 내 글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어린나이에 선택한 자살이후, 내가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끔찍했다. 글이나 책에서는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의 삶은 훨씬 더 힘들었다. 또 앞으로도 힘들게 버텨야만 한다.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다 보니 최영철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낸 이후 3-4번째부터는 칼날 같이 날카로운 말(글)을 해 댔다.


그곳 사정이야 어떻든 그에게 온 편지 내용이 ‘감사, 기도, 주님의 뜻, 겸손, 성경,.....’ 진짜 목사 같고, 신학생 같은 소리만 해서 오히려 내가 짜증내며 “창세기부터 계시록의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 까지 서각으로 새겨 봐라. 그렇다고 형제님의 삶이 바꿔지나! 남은 인생에 대해 의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며, 현실을 인정하고 주시하라...” 이런 내용의 답장까지 보낸 적이 있다.


나도 내 삶에 힘들어하며 ‘삶의 의미’, ‘생일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노력하고 살아왔다. 그의 생일날 내 이런 생각을 길게 서술 할 필요도 없이, 생일부케를 만들어 소포로 부쳤다.


난 최영철이 나머지 인생을 남들처럼, 사람답게(?) 살기를 바랐다. 사람답게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지난 과거에 대한 보상이라고 그에게 편지로, 말로,...

2005년 현재도 하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은 달랐다. 최영철 개인보다는 최영철 뒤에 있는 사람들(?) 이해를 돕기 위해 가·톨·릭·사·회·복·지·분·과·위·원·회(가톨릭교정사목위원회) 라는 말을 천천히 그리고 여러 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면 내가 하는 말들에 대해 조금은 느낌이 올 것이다.


적어도 가톨릭 사회복지 분과 위원회에서 사회전반에 걸쳐 out?side의 인생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재사회화’교육을 위한 몇 사람의 모델들이 필요하다면, 최영철은 너무 많은 조건을 갖춘 인물이었다.






14.

최영철이 98년 가톨릭 사회 복지 분과 위원회의 주선으로 신월동 나눔의 집에 근무하면서 서각 작업을 시작했다. 미리부터 나에게 말한 대로 12폭 병풍을 만들어 그 해 대한민국 서 각 대전에 출품해서 ‘입상’과 함께 ‘그 해의 문제작’으로 꼽혔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나도 세종문화회관 전시실까지 가서 그가 만든 병풍 앞에서 폼 잡고 사진을 찍으며 대견하게 생각했었다..... 위에 올려놓은 사진이다.





15.

.....최영철은 나한테만 밀어 놓으면 자기 카드 빚이 저절로 해결 되는 줄 알고, 2000년 5월에 삼성카드 강서채권팀에 연체보증 서 준 빚 1390만원 중에 1200만원 이상의 원금과 카드이자에 이자,...그것도 연체이자로 계산 된 터무니없이 비싼.... 그 와중에도 아들 분유 값이 없다는 눈물어린 사정에  2001년 1월인가2월인가에 LG카드 90만원 막아주고 ,....그 액수를 떠넘긴 것만도 모자라서 2003년 6월부터 그의 부인이 임신해 배부른 몸으로 사정사정하면서 하는 부탁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들어주었다가 2003년 가을에 400만원 또 당하고,...나 역시 돈이 없어서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빌려준 돈이었다....카드원금과 비싼 이자에 이자....


그러면서도 엎치락뒤치락 희한한 인간관계는 유지하고 있었다.



16.

최영철이 2005년 3월 30일부터 4월 5일까지 명동성당 내의 가톨릭회관 1층 ‘평화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졌었다. 그때는 교회의 피아노도 팔고 책도 팔아서 이사비용과 홈페이지를 업 시키는 비용을 마련할 때인데, 이때도 나에게 1주일간의  화랑 임대료 150만원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며칠 내로 보내 줄 테니 40만원만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곳에서도 화랑 임대료 150만원 중에 40만원이 모자라서 ‘물건으로 잡아 논다.’는 그의 절박한 부탁을 듣고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 역시 교회피아노까지 팔아야 될 지경이라면서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약속은 또 무산되었다.





17.

2005년 3월 30일부터 4월 5일 전시회 때도 시인 이 **수녀의 와서 방명록에 ‘희망의 사람’이라는 시와, 문화 평론가 정**신부의 격려의 글...

다 좋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 곳은 그 유명한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평화화랑, 가톨릭신문,...소위 ‘믿음, 신앙, 종교 , 인간...’단어들이 제일 많이 거론되는 곳이었다.


보통 큰 교회의 교인이나 성당의 신자가 이 정도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갖는다면 150만원어치의 물건들을 처분하는 데 1일도 안 걸린다. 하지만, 최영철이 1주일을 전시해도 기껏 화랑 임대료 150만원어치도 팔지 못했다.

이 정도로 힘든 상황이 그가 부딪친 인생여건이고, 내가 그를 도와주는 ‘이유의 전부’이다.


전시회를 끝내고 6일 오후 나에게 왔을 때는 온 식구가 2끼를 굶은 채 내려 온 상태였다.


가톨릭, 사회 복지 분과 위원회, 교목 위원회, 목사 몇 명,  장로, 연극인 ** ....그의 특수한 입지조건 덕분에 몇 번 TV에서 조명을 비춰 준 적이 있었는데, 그와 친한척하거나 그의 이름을 거론 될 때 뒷배경으로 나오는 단체나 이름이고....나는 ‘숨겨진 사람’ 역활...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의 뒤처리를 해 주는 사람은 성당도 아니고 신부도 아니고 수녀도 아니고 유명목사도 장로도 아니고....목사치고 너무 힘들고 황당하게 사는 내가 또 해주었다.


나도 다른 종교인들이나 유명 사회인사들 처럼 말이나 글만 가지고 온갖 생색 다 내가면서 좋은 사람, 훌륭한 종교인, 목사,.... ‘난 척 하는 인물 역할’ 좀 해 보고 싶다.


내 몸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 왔지만 결과는 지금은 내 존재는 내가 도와 준 사람들한테 오히려 짓밟히고 물어 뜨긴 흔적으로 홧병만 간직한 채로 살아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숨겨진 존재’로만 남아있기도 더 이상은 싫다.


그와 인간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2005년 8월부터는 단절한 상태이다.

....






내가 홈페이지와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은 내 인생을 토해내는 글들이다.
어쩌다 한두 번 읽어서는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많은 글이고, 오늘 올리는 글도 긴 분량의 글을  짧게(?) 편집한 글이라 내용이  매끄럽지 못하다. 내 홈페이지
www.mryoum.com은 지겹도록 희한한 내 자신의 전부를 죽기 전에  넓은세상에 내 보이려고 만들었다.

http://ministeryoum.blogspot.com/....나만의 공간으로 잠깐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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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살아라!

인생1./ Naked Life1. 2007/10/30 10:48
 







5. 얌체친구 ( 난, 나 잘난 맛에 산다! )


1.

누워만 있었던 시절을 기억할 때면 기억되는 두 명의 친구가 있다.

염규종과 전*렬, 두 명 모두 고향 친구이다. 79년 여름을 말하거나, 내 인생을 거론할 때면 염규종과 전*렬, 2명이 가장 고마운 친구로 지명되는 인물이다.

당시 규종이네 집과 우리 집은 경기도 수원시 율전동 336번지의 땅위에서 울타리 까지도 같이 써야했던 이웃집이었는데, 규종이는 농사짓는 집안의 장남답게 어린나이 때부터 농사일을 거들어야했다. 이 부분에서는 장남인 그와 막대인 나는 너무 다르게 자랐다.


내가 누워있던 77~79년 사이, 특히 78년은 유독이 가물었었고, 또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해 그가 직접 지은 참외를 딸 때면 꼭 몇 알씩을 챙겨 오곤 했었다.

비록 상품성이 떨어지지는 몇 알의 참외였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규종이의 행동에 내심 고마워하고 있다.





당시 내가 다녔던 파장초등(국민)학교는 시골 학교였고, 어찌된 일인지 파장 초등학교 주위의 동네들은 60년, 61년생들이 심지어는 62년생까지도 나이를  구별하기가 힘든 상태였다. 아마도 60년의 4.19 학생운동, 61년 5.16 군사 쿠데타,...등으로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여파가 당시 시골에서 태어난 신생아들의 출생신고에도 영향을 끼쳐서 유독이 60년, 61년도에 태어났던 아이들의 출생신고까지도 뒤죽박죽 된 것 같다.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는 규종이의 행동이었지만, 79년 8월 이후에 점차로 살아남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마음 한 구석에 규종이와의 2살 차이에 대한 거리감을 뛰어 넘지는 못했다.

동네의 다른 친구들은 이런 간격을 뛰어 넘어서 60, 61, 62년생들이 한꺼번에 어울리는 측도 있었고  60년 생중의 몇몇 친구들은 그렇지를 못했었는데, 나는 어울리지 않는 몇몇에 속했다. 지금이야 2년을 우습게 여기지만 감수성과 텃새, 나이 값이 판을 치는 20대 초반은 그렇지를 못했었다.


그 이후에도 서너 번  그의 신세를 진 적이 있다.

한번은 결혼했었던 여자를 돕기 위해서 결혼을 앞두고 규종이에게 1500만원을 빌렸던 적이 있었고, 책을 출판하기 위해 사용했었던 카드를 돌리기 위해서 2-3번 돈을 빌린 적이 있다.

아직까지는 규종이한테 “고맙다”는 말을 서너 번이나 참고 있는 셈인데, 내가 죽기 전에 마음속에 남겨 둔 빚을(?) 갚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


또 한명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전*렬이다.

오늘날의 내가 있기 까지는 내 부모형제와 서정호 목사님과 전*렬를 인정해야만 한다.

79년 8월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내 핏줄이 아니고, 당시 서정호 전도사(후에 목사를 받음)와 전*렬의 주도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81년도 1월에 안양에 있는 성결 신학교(지금의 성결대학교)에서는 필기시험 없이 서류전형만으로 신입생들을 모집한 적이 있었다. 그와는 81년 1월에 성결 신학교에 입학원서도 같이 낸 적인 있었다. 79년 이후 99년까지 그와는 몇 번은 트러블이 있었어도 그런대로 친구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냈었다.

2000년 1월 1일 내가 결혼을 하면서 그의 변덕스런 성격 때문에 울화통을 터트리다가 2001년 5월 이후에는 결별된 적도 있었다. 최영철의 병풍을 내가 권해서 그가 99년 7월에 구입했었는데, 구입조건은  선구 후지불 조건이었다. 그 돈은 우선적으로 내 통장에서 빼서 최영철한테 건네주었는데 99년 7월부터 2001년 5월 까지 근 20개월 동안 400만원 중 100만원  받았었다.

자기 입으론 한달 용돈으로 400만원이나 그 이상을 쓴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놈이 아무리 내가 권해서 산 병풍이라도 병풍 값 400만원 중 100만원만 지불하고 나머지 300만원은 오리무중이었다.


2000년 1월 이후 몸도, 마음도, 돈도 너무 꼬이고 힘들어서 안산의 교회건물을 정리하고 병점으로 올 때에 그에게 나머지 300만원을 요구했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그리고 병풍을 도로 가져가란다.

여기까지는 참을 만 했다. 당시 잔금 받을 날짜는 5월 31일이고, 이사 날짜는 5월 20일로 기억한다. 하여튼 잔금 받을 날짜와 이사 하는 날짜사이에 10일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전*렬에게 그 사정을 이야기 하고 5층까지 나무 병풍을 옮기려면 이사할 때 가져가야 하니깐 돈 100만원은 2주 뒤에 주겠다고 하니깐 “돈 100만원 가져와서 병풍 가져 가라”고 딱 잡아떼었다.

그러면서 “상명아 너도 사회생활을 해 봐서 알 테지만 거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피차에 딴 소리가 안나오게 돈하고 물건하고 맞바꾸게 당장 돈 100만원 가져와서 병풍 가져가라”는 것이 그의 매몰찬 전화기를 통해 건너오는 답변이었다.


단 돈 100만원의 거래! 무슨 거래! 20개월 동안 잔돈을 주지 않다가 병풍을 다시 가져가라는 조치는 제대로 된 거래인가? 그게 40년 동안 한 동네에서 산 친구놈 한테 할 소린가! 또 그 당시는 내가 너무 힘들었을 때였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던 시기임을 밝혔어도 몰인정하고 매몰찬 그의 태도에는 더 이상 할말을 잃어야했다.




한 달에 용돈으로 400만원이상을 쓴다고 자기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는 놈이 기껏 단돈으로 100만원에 “...거래”운운하는 데에는 진짜 상종하기 싫을 정도로 그가 싫어졌다. 내가 권했다는 이유로 20개월 만에 물건을 퇴짜 놓는 병풍을 2~3일 뒤에 100만원을 마련해 가지고 가서 병풍을 도로 가져왔다. 2004년 여름에는 이 병풍 때문에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지만 최영철이 만든 나무 병풍으로 인해 그와 얽힌 이야기는 여기서 멈춘다.

지금도 79년 여름을 말하거나, 내 인생을 거론할 때면 한번은 가장 고마운 친구로, 한번은 가장 별 볼일 없는 놈으로 지명하는 인물이 전*렬이다.


황당한 몸을 가지고 혼자서 힘들게 출판사를 설립하고, 책을 만들고, 책을 출판하고, 2003년 12월15일 조촐한 출판 기념회를 하기 위해서 극히 적은수의 주변사람들과 초등학교 때의 같은 반 학우들만을 초대했지만, 극히 적은수의 주변사람들 중에서도 반 정도는 오지를 않았다. 전*렬은 초등학교의 반 친구이기도 했는데, 그도 오지 않은 주변인물에 낀다.

뒤에 들리는 말로는 내가 자기네들의 행사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다가 필요한 한 순간에만 “....내 실속만을 챙기기 위해서 자기들을 오라고 하는 ‘얌체’...”라고 했다고 한다.

후에 이런 말을 전*렬을 통해서 듣다 보니 이번에는 내 입에서 ‘미친놈들’이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초등학교 친구들한테 들어야만 했던 ‘얌체’라는 말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싶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얌체’라는 말은 200년 1월1일 내결혼식에 와 주었던 일과 2001년 1월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조문 와 주었던 일을 근거로 한 말들인데, 아버님 이 돌아가셨을 때 조문 와 준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내 몸 사정상, 그리고 내 형편상 초상집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다니지를 않았었다,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하루의 볼 일을 햇볕을 피하기 위해 아침 6시-9시 사이에 해야만 하는 몸을 가지고 남의 대소사에 찾아가서 인사치례를 한다는 일자체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햇볕이 강한 하반기에는 9시 보다도 더 이른 시간에 일을 끝내야만 한다. 또 내가 찾아 갈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사회의 관습상 오전 9시-10시 사이에 집안의 대소사, 특히 초상집문상을 해야 하는 집은 거의 없다.


그러나 결혼식장에는 어느 정도 얼굴을 내밀었었다. 우리나라에서 남자들의 결혼 적령기인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정도이다. 200년1월1일에 결혼한 나와는 1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초등학교친구들 역시 대부분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정도에 결혼식을 했었고, 그 중에 몇 친구의 결혼식에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에 내 결혼식에 와 준 것에 대해서는 크게 고마워 할 입장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초등학교 친구들한테 들어야만 들어야 했었던 ‘얌체’라는 말은 아버님이 소천 한 때에 와 준 것만을 가지고 내가 필요할 때 만 자기들한테 연락하는 ‘얌체’였다는 말이 된다,





3.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진짜 할 말이 많다.

초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녀석들로부터 ‘얌체’라는 말이나 들어야 했던 내 인간성을 논하기 이전에  햇볕, 열, 더위, 습도, 불빛,... 인간의 삶을 유지 지켜주는 이런 요인들에 적응하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25년째를 살고 있는 중이다.(25년은 초고를 썼던 2002년 기준. 지금은 30년) 살고 있는 중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살기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초등학교 때의 반 친구들이나 주변 인물들, 내 가족이나 친척들 모두가 내 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점과, 앞에서도 수 없이 언급했던 미친놈‘이라는 수식어 정도에서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를 않고 있다는 점이다.

2003년 12월15일의  출판 기념회 때도 나의 이런 형편을 스스로가 잘 아는 터라 초대하는 인원수를 극히 제한했었는데, 그 적은 인원까지도 초등학교 때의 반 친구들과 같은 생각들을 했었던 모양이다.


아버님이 7형제의 막내였기에 ’4촌‘이라고 불리는 친척들도 많다. 지난 5년 동안 목사로서 힘겹게 버텨오는 기간 중에 단 한명의 4촌조차도 얼굴 한 번 내밀지를 않았다. 4촌들 중에는 기독교인들도 있고 비 기독교인들도 있지만, 그 많은 4촌들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인사치레로 한번쯤 들려주는 절차조차도 생략해 버렸다. 심지어는 친조카사위 녀석도 결혼한 지 4년이 지나 5년이 되어 가는데도 처삼촌, 아니면 처 작은아버지인 나에게 한번 들려서 인사하는 절차조차도 생략한 채로 살고 있으니,...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욕을 얻어먹을 정도로 살지도 않았다. 내가 살면서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나에게 품는 감정이란 게 고작 “...제 까짓게” “...제 주제에” 라고 무시하지 않으면 질투, 시기, 대립,...이런 종류의 감정 인 것 같다. 




내가 몸담고 있는 목사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몸을 가지고서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내 나름대로 목회를 하는 것에 대해서 격려는 못해 줄망정 몇몇 목사들은 (극히 적은 수의 목사들만 알고 지낼 뿐이지만) 온갖 어려움 가운데서도 내가 교회를 계속한다고 해도 묘하게 비웃는 표정이나 짓고, 책을 쓴다고 해도 비웃거나 고개를 흔들고. 그 책들을 알리기 위해서 내 나름대로 인터넷작업을 한다고 해도 비웃고, 내 개인 홈페이지를 활용 해 목사로서 살아남겠다고 해도 비웃고,...심지어는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목회하려면 목사를 그만두라.”는 말까지도 내뱉는 후배목사도 있을 정도다. 속이 비틀린 족속은 내가 아니고 오히려 ‘내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지금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 중이지만 햇볕, 열, 더위, 습도, 불빛,...에 내 몸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은 낮 시간동안의 외출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여름 4개월 동안에는  산책과  집안일도 햇볕이 강하기기전인 아침 6시-9시 사이에 해야만 한다. 오전 9시 이전에 하루의 볼 일을 다 해야 한다. 1년에 6개월 이상은 은행일도 대부분 이 시간정도에서 해야만 하는 게 나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이다.


이런 부분들이 내가 부딪치고 있는 사회생활이고 인간관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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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ce with me!

인생1./ Naked Life1. 2007/09/20 09:36




4. Dance with me!


나와 함께 춤을 - 춤 짱(?) 염상명목사의 춤과 건강에 대한 생각....




내 홈페이지 www.mryoum.com 의 동영상에서 내 춤 동작을 본 사람이라면, 목사라는 사람이?....책에서 지금까지 했었던 자기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 몸으로!...을 생각 할 수도 있다


내 몸에 맞게(?) 행동 했더라면 79년 8월 이후에 내가 해 낼 수 있었던 동작들이라야 느릿느릿, 조심조심 걷는 것까지만, 먹을거리는 죽이나 스프 또는 질척한 밥 정도에서, 그 외에도 춤, 당구, 볼링, 목사, 출판,...이런 것들을 시도조차도 못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끝났을 것이다


77년 이전에는 특별하게 춤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춤에 관심을 갖고서 좋아 한 것은 80년 이후부터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와 경제?날씨까지 엉망인 80년 여름에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했었다. 집에서 흑백 TV로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를 지켜봤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본선에 ‘미스코리아 진’ 김은정(?)양을 포함해 12명의 각국을 대표하는 미녀들이 뽑혔는데 본선에 오른 12명의 미인들에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이 원피스를 선물하기로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원피스를 자기 취향대로 선택하여 골라 입은 후에 12명의 후보들이 최종 인터뷰 심사를 행해지기로 예정되었는데, 본선에 뽑힌 12명의 미인들이 원피스 고르는 것을 돕기 위해서 당시 우리나라의 톱 모델 12명이 그 원피스들을 입고서 세종문화 회관 무대 위를 모델들만의 독특한 걸음으로 누비고 다녔다.





세종문화 회관의 넓은 무대가 좁다고 걸어 다니는 모델들을 보다가 ‘아하, 바로 저거야!’를 속으로 외쳤다. 그날부터 내 걸음 걸이가 희한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내 몸 상태라야 계단을 내려 올 때는 계단에 발을 모아서 한 계단 한 계단을 옆으로 내려오고, 또 다시 발을 모아서 옆으로 내려오고,...한 마디로 말해서 ‘위태위태하면서도 엉거주춤하게’ 내려오던 때였다.


또 -지금처럼 무릎이 시린 증상은 없었지만- 발바닥이 너무 약해져서 당시의 시골집의 마루 바닥을 밟는 게 힘들어서 한 여름에도 양말을 신어야만 했었던 시기였다.

그럼 몸에 여자 패션모델의 걸음걸이를, 무대가 아닌 일상의 생활에 옮겨 왔다.


1권 ‘아직도 살고 싶다’의 Ⅰ부, 성기능부분에도 나오지만 모델들의 무대 걸음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운동 효과가 있다. 목과, 척추, 무릎을 곧게 펴고, 대신 어깨와 골반은 제각기 움직이는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한번 생각해 보라!

걷는 것도 위태위태할 정도의 몸에, 몸무게는 고작해야 44∼46㎏정도, 지금처럼 리드미컬하게 걷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뒤뚱뒤뚱, 어깨 따로 엉덩이 따로,... 지나가던 사람들도 뒤 돌아 볼 정도의 걸음걸이였다.


지금도 내 걸음걸이는 중년남자나 다른 목사들처럼 점잖고, 무게 있는 걸음걸이하고는 거리가 멀다.




대학시절에는 춤과 패션으로 학교 내에서 유명 인물이었다.

우스운 일화 2∼3가지만 말해 보겠다.

3학년 수학여행 중에 과대표 하던 친구가 “야! 상명아 너 지금 춤 동작 연습하고 있냐??.... 걷는 게 아니고, 나비가 팔랑거리는 것 같다!”고 할 정도의 걸음걸이였다.


또 다른 일화는 (이것도 수학여행 중에 일어난 일인데,) 그때 여관방을 4개 잡았다. 1개는 수학여행을 인솔하는(?) 담당교수, 1개는 여학생 방, 나머지 2개는 남학생 방 이었다.

난 지금이나 그때 나 일찍 자는 편이다. 수학여행 중의 다른 친구들이 큰 방에 모여서 놀 때도 난 잠을 자기 위해서 작은 방에서 샤워하고 베이비 기름을 온 몸에 발라서 마사지 한 뒤, 옷 하나 걸치지 않고 큰 대자(大)로 누웠다. 내 이런 모습을 본 과 친구 녀석이 소문을 내는 바람에 다른 친구들까지 야단법석을 떨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에까지 내 몸에 대한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84년 당시) 178㎝ 혹은180cm, 57∼58㎏의 몸무게, 적당히 음식조절하고, 춤을 자주 추고, 뒤뚱거리며 걸어서, 나만의 독특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보통의 다른 남자들이 이 신체 조건이면 ‘너무 말랐다는’ 말을 듣는다. 헌데 나는 옷을 입으나 벗으나 ‘말랐다’는 말보다는 ‘야하다’는 말을 더 많이 듣는다.

어깨나 골격 등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좁거나 넓거나 작거나 하지 않는 균형 잡힌 골격이다. 이 골격 위에 살이 있을 곳만 최소한으로 붙어(?)있는 일명 ‘뼈다귀 위에 초배 한 몸매’-(일명‘튀기’스타일. ‘튀기’는 세계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은 모델이름임) -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그때 보다 2~3kg 늘어나서 공복 시에 60kg 정도의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이 부분은 2003년 초고 원고를 기준). 대학시절의 수학여행은 지금부터 20년 전인 84년도에 다녀왔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아직까지도 20년 전의 몸매와 몸동작과 감성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별짓 다해가면서’ 까지 20대의 몸을 ‘붙잡아 둘 수만 있으면’ 붙잡아 두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얼굴, 몸매, 피부, 체력,...값 비싼 보약들과 각종 건강식품들, 비아그라와 보톡스, 운동 기구들과 다이어트 프로그램, 기능성 화장품들이 팔리고 있는 것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시간의 흐름’을 늦추거나 멈추기 위해서 선택하는 몸부림들이다.


내가 내 삶을 부둥켜안고서 뒹굴러 온지도 벌써 2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나만의 독특한 내 삶의 방식들이 20대, 30대, 40대,...시간이 지나 갈수록 그 빛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내부 속에 잠재된 건강에 대한 희망을 내 방식으로 적나라하게 끄집어내고, 까발리고, 그리고 실행으로 옮겨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는 있는 중이다.





중증의 다른 당뇨병환자들 / 관절이나 류마티스 환자들 /....그 밖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진행성 만성질환으로 몸이 - (특히 관절이나 근육에 경직현상이 오기 시작한 환자들) -망가져 가고 있는 환자들,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장애우들,...에게 사회적 상식이나, 고정관념, 그리고 통속적인 생각들을 접어둔 채 그들의 건강과 남은 인생을 위해서 막-춤을 권하고 싶다.


지금까지 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선입견 중에서 막춤은‘ 젊고, 건강하고, 머릿속에 똥만 든 사람들이 무조건 흔들어 대는 몸동작’이라는 선입견을 버렸으면 한다.


내 글들과, 내 삶과, 내 몸매와 내 춤동작을 통하여 춤, 그것도 막-춤이라도 ‘늙고, 병들고, 머릿속이 꽉 찬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뛰어난 춤동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한다. 오히려 남들보다 나이가 많고, 병들고, 삶 전반에 대한 풍부한 지식까지 갖춘 사람들일수록 춤을 잘 출 수 있는 기질을 간직하게 된다고 본다.

살아오면서 경험한 인생의 사건들을 밑천으로 ‘감정’이라는 가장 값비싼 예술적인 재질을 바탕으로 자신의 인생과 대중문화의 전반에 걸친 식견을 가지고 음악과 춤을 자유자재로 ‘재해석’까지도 해가면서 자신만의 춤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울부짖는 자유인’이면서 “춤-짱”이기도 한 염상명목사의 춤에 대한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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