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삶1....Why! Why! Why!....아직도 진행형!(ing!)....
1.
최영철,,,,최영철을 10년 넘게 알고 지내왔지만 지금까지도 그의 나이와 전과기록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호적상 53년 생, 본인의 추측으로는 56.57년 생, 그리고 2001년 11월 말 KBS 2TV ‘장밋빛 인생’에 출연해서는 59년 생으로 자신의 나이를 밝혔다.
93년부터 2001년 11월까지는 그의 나이를 56,57년 생으로 알고 지내왔다.
지난 몇 년 동안 몇 개의 사건이 한꺼번에 겹쳐져 산다는 것 자체에 독이 올라서 으르렁거리며 살아왔다. 몇 개의 사건들 가운데서도 최영철이 남긴 상처로 인해 마음고생, 몸 고생, 돈 고생을 크게 하게 했던 장본인이다.
최영철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93년 4월부터이고, 직접 만나 본 것은 그가 청송 교도소를 출소한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 졌다.
내 성격상 지난 일을 들추는 성격이 아니기에 대충 어린 시절부터 교도소를 드나들기 시작해서 삼청교육대에서 2번이나 교육 받고, 청송 교도소에 2번이나 수감되었다는 것 정도이지, 어떤 죄목으로, 전과 몇 범을 기록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다. 지나치게 화려한(?) 인생 경력을 지녔다는 것 정도로 알고 지내 왔다.
‘지내왔다’ 가 지금부터 쓸 내용이다.
....
2.
최영철이 2번째로 청송 교도소에 수감되기 전에 서울 구치소에서부터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을 찾아 수감 전에 인연이 있었던 서목사님에게 4통의 편지를 부쳤다. 서울 구치소에 보낸 4통의 편지는 내가 간직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없앴다.
이때가 서목사님 내외분한테도 가장 힘든 시기였기에 도움을 청하는 최영철한테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나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당시 신대원을 합격하고 휴학 상태에서 책이나 보고 내 몸이나 관리하면서 신학적 “의”를 생각하며 지내던 나에게 특별한 설명도 없이, 교도소에 있는 사람과 편지로 사귀어 보라는 사모님의 권면에 선뜩 응했다.
내 이름도 모르는 최영철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와 인연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오늘까지 왔으니, 그와의 인연이 10년 넘는 긴 시간동안 이어져온 것이다.
3.
1993년 4월부터 1997년 2월까지 내 쪽에서 190통이 넘는 편지와 소포를 보냈다. 최영철도 비슷하게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나에게 보낸 186통의 편지와 서목사님에게 보낸 2통의 편지를 합쳐서 최영철이 나에게 보낸 188통의 편지를 가지고 있다.
후일 여건이 허락 된다면 나와 최영철 사이에 오고 간 편지를, 내용이 유치하더라도 내용 바꾸지 않고 편지-답장 형식의 책으로 만들고 싶다.
4.
93년 4월 이후 그에게 생일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감성어린 선물을 몇 번 보냈다.
한번은 만화 그리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1년 12달을 상징하는 12장의 그림을 그리게 한 다음, 그림들을 코팅하고 연결고리로 연결해서 보냈는데, -그곳 규칙상 코팅 된 그림은 수감자에게 납입 할 수 없는 물건이어서 ― 그림들을 보기는 했어도 받아 보지는 못했다고는 사실을 출소 후에 밝혔다.
이런 소포가 몇 개 된다.
또 ‘괜히 고상한 척 해탈한 척하며 의욕도, 욕심도 없이, 모든 것에 감사하다’ 는 식 의 그의 편지를 읽고, 당시에 유명했던 “쇼 생크 탈출” 이라는 영화를 예로 들어-살 만한 몸을 가지고, ‘성기 발랄한 몸뚱이’가 허락 될 때-사는 것에 대한 의욕이 남아 있을 때에 출소해서 아직 남은 인생을 ‘남들처럼, 사람답게 살라’는 식의 편지도 몇 번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런 내용의 편지들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사실은 그가 출소한 97년 2월 이후에야 안 사실이다.
5.
만 4년 동안 서로가 190여 통의 편지들을 보냈는데도 그때까지 그의 얼굴을 몰랐다.
내 쪽에서는 편지 이외에도 몇 번의 소포와 내 사진을 보내서, 그는 나에 대한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릴 수 있게 했지만, 최영철은 나에게 일부러 자신의 사진을 안 보냈다. 자신의 인생 중에 가장 초라한 시절의 모습을 진심을 보여 가며 자신을 사람대접 해 주는 나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또 청송교도소로 면회 가는 것이 내 몸으로는 너무 힘든 일이더라도 한 번은 가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면회 갈려는 나의 생각을 편지 속에서 읽고는 극구 밀리는 답장이 왔다.
그 이유를 그가 출소한 뒤에야 알았다.
나와 편지로 오래 기간 사귀다 보니 내가 몸도 아프고, 성깔도 대단하고, 그 반면에 의외로 순진하고, 그런 곳의 사정은 아예 백지 상태인 것을 알기에 면회 간다는 내 편지를 읽고는 오히려 뜨끔했다고 한다.
내가 그 곳 사정을 모르는 것이 뻔한데 그곳 사정을 편지로는 알릴 수가 없던 게 그때의 상황이었다. 당시 그의 별명이 ‘딱 통’이라고 했다. 이 말이 도살하기 위한 살진 숫돼지라는 것도 나중에야 그에게서 들었다.
형편없어진 자신의 외모를 보이기도 싫고, 또 내가 면회를 올 때 자신에게만 필요한 것들만 사 가지고 올 것이고, 그러면 자기는 그곳에서 진짜 따돌림 ― 왕 따 ― 를 당한다는 것도 출소 후에야 말해 주었다.
청송 교도소의 보이지 않는 규칙 중 하나가 재소자에게 면회가 오고 먹을 것이 반입되면, 일부는 상납되고 나머지는 같은 방 재소자들 전원이 나눠 먹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내가 면회를 간다는 편지를 할 때까지도 이런 사실을 몰랐었다.
대학시절 수원교도소에 단기간 수감 중이던 고향 선배를 빈손으로 면회 갔던 것이 내가 경험한 교도소에 대한 전부였다. 청송처럼 오랜 시간 수감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실상을 들어 본적도 없었다. 수원 교도소에 고향 선배를 면회 갔을 때도 빈손으로 갔지만, 다른 사람들도 면회 갈 때, 돈 얼마, 그리고 먹을 것 조금, 내복 정도를 가지고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청송교도소의 불문율은 ?앞에서 말했듯이 ? 일부는 상납하고(?) 나머지는 나눠먹는, 가장 바람직한 ‘재분배’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사과를 가지고 간다면 대형 박스로 1박스 이상, 떡을 가지고 간다면 1말 이상의 떡,..... 이런 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가 면회 할 재소자의 몫(?)만 가지고 간다면, 그 재소자는 면회 후에 완전히 ‘왕 따’ 취급을 당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남들이 면회 올 때 마다 얻어먹었는데, 자기 면회 올 때는 ‘혼자 먹고 입 닦은 꼴’이니.... 그가 면회 오는 것을 극구 말릴 만도 했다.
만약 돈으로 가지고 가더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몇 십 만원은 되어야 그 곳에서 많은 물건을 사서 그 물건을 다시 그 재분배 할 수 있지, 서너 개의 물건만 사게 된다면 그것을 누가 가질 것인가...... 이 정도가 안 되면 아예 면회를 오지 않는 게 낫다고 한다.
또 먹을 것을 가지고 갈 때도―옛날 교도소처럼―배고파서 아무거나 덥썩 거리며 먹던 시절이 아니기에 신경을 써서 먹을거리를 준비해 가야 된다는 것이다.
내 친구나, 내 가족, 가까운 친척 중에 청송 교도소는커녕 일반 교도소에 조차도 장기간 수감된 사람들이 없다 보니, 출소 후 최영철이 하는 말을 듣고서야 그때서야 그곳의 형편을 알았고, 또 이해가 됐다.
나뿐만 아니고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4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어도 그의 얼굴을 몰랐다.
6.
청송 교도소 출신의 최영철과 또 다른 1명을 깊이 사귀면서 청송 교도소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된 사실들 중에 하나는, 아직까지 우리사회에서는 금기시된 ‘동성간의 섹스’와 교도소직원들의 비리였다.
청송 교도소는 교도소중에서도 특수한 교도소였다.
청송 교도소수감자들은 5년-7년이 형을 살게 되어 있다. 정확하게는 7년이 조금 못되는 시점에서 출소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종교적인 수도생활이 아닌 사람들이 5-7년, 이 긴 시간 동안에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그들 나름대로 적절하게 해소하고 있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아직도 이런 부분을 깊이 다루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돈의 위력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도 청송 교도소라는 사실이었다.
보통의 재소자들인 경우에는 1달 노역의 품값이 고작 몇 만원인데, 그 곳에서 비밀리에 거래되는 담배 1개비의 가격이 1-2만원이란다.
이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몇 단계가 개입된다는 사실도....
청송 교도소와 삼청교육대는 80년대 초 5공화국 때 악명을 떨치던 곳이었는데, 앞으로 25년 뒤에는 이 모든 일들이 “쇼 생크 탈출”처럼 전설로 남아 있게 될 것 같다.
7.
95년 대입 검정고시에 재차 응시하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오고 나서부터 그의 편지 속에 시험 준비.결심.불안.초조.긴장.기도.최선...등의 단어들이 눈에 띄게 많아 졌다. 대입 검정고시 시험을 앞두고는 그가 들떠있다는 느낌을 편지을 통해서 느껴지곤 했다.
그 때 내가 보낸 편지 중에 “난, 최영철이란 인간을 선입감 없이 사귀고 있는 것이다. 형제님이 이번 검정고시에서 올 백 점을 맞건, 전국 수석을 하건, 떨어지건, 지금의 사귐에는 변함이 없다” 식의 답장을 보낸 적이 있다.
시험을 치룬 뒤 “한 문제를 실수 한 것 같아 걱정은 되지만 만족할만한 시험을 치렀다. 담담하게 결과를 기다리겠다.” 내용의 편지가 왔다.
시험 결과는 그가 바라던 대로 전 과목 100점으로 전국 수석이었다.
8.
최영철의 95년 대입 검정고시에서 전 과목 100점으로 전국 수석 합격의 쾌거는 대입 검정고시를 2번 합격한 결과였다. 최영철이 비록 좋지 않은 쪽으로 화려한 경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의지와 집념을 가지고 자기 일을 추진해 나갈 줄 아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내가 알기로는 청송 교도소 첫 번째 수감 중에 대입 검정고시를 97점 아니면 97.5로 합격해서 경상북도 수석 합격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청송 교도소에 두 번째 수감 중에 대입 검정고시를 본인이 원한다면 다시 볼 수 있고, 먼저 번 점수 대신 나중 점수로 대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본 다음 남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독방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한다. 그 안에서 오랜 기간을 하루에 4시간 정도의 잠만 자면서 전 과목 100점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
나의 80년 5월의 대입 검정고시 합격점수가 평균 62.5아니면 63.5와 비교해 보면 그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는 쉽게 알게 된다.
9.
96년 말부터 출소하면 꼭 찾아뵙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몇 번 오고 난 뒤 97년 2월 말에 내가 살던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의 전셋집을 찾아오기 위해 성대 앞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그 날 조카와 다른 1명을 과외공부 시키던 때라, 전화를 받고는 조카와 조카친구를 일찍 보내고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편지 속에다 대충 자신들의 외모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어서 첫 대면이면서도 서로 특징 있는 외모(?) 덕에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최영철이 나를 처음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내 편지를 읽고 머리 속으로 생각하던 내 몸보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몸이 훨씬 더 건강하다는 것이다.
그때는 2월 말이었다.
내 몸의 특성상 10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는 당뇨병으로 인해 인슐린 주사를 맞고 합병증 관리에 주의만 하면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까지는 그가 미쳐 생각해 내지 못했다. 편지에 내 몸의 특성을 자세히 밝혔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몸 이상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던 것이다.
2번째로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내 식사습관 때문이었다.
그와 처음으로 대면하고 첫 식사를 내 집에서, 내가 직접 만들어, 내 방식대로 했다. 내가 차린 저녁식사를 보고 그가 “...이렇게 먹고 사느냐?”고 반문하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가 “....이렇게 먹고 사느냐?”고 반문할 정도로 가볍게 먹고 사는 게 내 식사 습관이다. 보통 하루 3번 식사에서 2번은 빵, 떡, 과일, 고구마 , 감자, 커피, 우유, 주스, 맥주(그 당시는 마주앙).....등 보통 사람들이 간식정도로 생각하는 먹을거리들로 2끼 식사를 해결하고 산다. 더구나 혼자 살다 보니 밥상이나 식탁이 있어도 바닥에서 적당히 먹을 때가 많은데, 남들이 볼 때는 황당한 식사 습관일 것이다.
최영철 눈에도 황당하게 보였나 보다.
그래도 그날은 밥도 하고, 냉장고를 뒤져 약병아리로 백숙도 만들었다.
반찬이라고 김치와 한두 가지 밑반찬 밖에 없고, 방바닥에 신문지 깔아 놓고 그 위에 밥, 반찬 등을 모양새 없는 그릇에 담아 놓고 “밥 먹자”는 내 말과 내 태도에 오히려 그 쪽에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날은 평소에는 안 하던 식사기도까지 해 가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해준 저녁식사 이었는데...
밥을 먹으며 내 이런 식사는 자신들이 생활하던 청송교도소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식사라고 했다.
“사람을 빵만으로 살수 없다”,,,,
그때는 이 말을 생각해 내지 못했는데 시간이 흐르다보니 이 말이 떠오른다.
10.
여기서 최영철에 대해서 몇 가지 부연 설명을 하고 싶다.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의지가 강하고 자신과도 싸울 줄 안다고 밝혔다.
그가 97년 2월 말에 출소하고 4월 20일 경까지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구경하면서 서각 학원과 학사고시를 위해서 덕성 여대 부설의 평생교육원에 다녔다. 그리고 4월 20일경에 먹고 살기 위해 택시회사에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단지 전과자라는 이유로 19군데의 택시회사에서 퇴짜를 맞았다.
교도소에서는 대입 검정고시에서 ‘전 과목 만점’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전국 수석을 하고 매스컴에서도 관심을 보였지만, 출소 한 후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차갑기만 했다. 특별한 직업도 아니고 택시 운전을 택했어도, 택시 회사마다 그를 거절했다. 그가 19 곳의 택시회사에서 퇴짜를 맞은 것을 말하는 동안 젖어 가는 그의 눈을 보니 그의 인생이 너무 처량해 보였다.
내가 그를 본격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1.
.....
8월이 이렇게 지나고 9월이 오고 찬바람이 돌 무렵, 새벽에 자기가 운전하는 택시를 몰고 그가 찾아 왔다.,
가톨릭 사회복지분과 위원회 쪽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가톨릭 사회복지 분과 위원회 (가톨릭 교정사목 위원회) 쪽에서 최영철이 97년 2월 출소한 후에도 열심히 사는 것을 7개월 정도 지켜보고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가톨릭 쪽의 연락을 받고 ‘개신교(교회)쪽에 남아 있느냐’, ‘가톨릭(성당) 쪽으로 가느냐?’ 의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고 이른 새벽에 나한테까지 온 것이다.
그 정도로 마음이 어린 면이 있었고, 또 그 때는 이미 목사세계에 대해서 실망을 한 시기이기도 했다. 청송 교도소에서 보낸 편지 중에는 가톨릭이나, 신부에 대한 언급은 없어도 교회나 목사에 대한 언급은 몇 번 있었다.
그날 새벽에 나에게 온 이유를 정리해 보면
첫째, 그의 마음이 어린 면이 있어서
둘째, 개신교(목사)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셋째는 그의 앞날을 생각 할 때 ‘과연 어느 쪽이 끝까지 도움을 줄 것인가’ 이었다.
그의 고민을 듣고 마지막 항목에 맞춰서 그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혼혈 고아, 불행한 어린시절, 화려한 전과 기록, 교도소에서의 ‘검정고시 전 과목 만점’이라는 성과, 그리고 출소 후에 힘들게 버텨내는 당시의 그의 생활태도.... 등을 망라할 때 가톨릭 사회복지 분과 위원회(교정사목 위원회)에서는 최영철이 가톨릭 사회복지의 프로그램의 하나인 ‘사회화’ 교육의 가장 적합한 본보기 인물로 지목된 것으로 해석했다.
나는 처음부터 그를 개인 대 개인으로서 사귀었지만 가톨릭 쪽에서는 달랐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 단체와, 최영철 뒤에 있는 ‘최영철과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의 대표자’로서 만난 것이다. 물론 쌍방합의에 이루어진 조건이나 계약보다는 가톨릭 사회복지 분과 위원회의 일방적인 후원과 교육이 주 내용이지만은, 이런 부분이 나와 가톨릭과의 차이점이었다.
12.
.....
99년 9월 그의 결혼 때까지는 가톨릭 쪽에서 적극적으로 그를 도왔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가톨릭 사회복지분과 위원회에서는 최영철을 지목했을 때 최영철 개인이 아니고 그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집단의 대표자’ 최영철 이었다.
물론 97.98.99년까지 가톨릭 내에서도 최영철과 개인적으로 친했던 사람들도 있고, 또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도와준 사람은 있었다. 그래도 가톨릭과 최영철과의 관계는 집단과 개인이 아니고 집단과 집단의 대표관계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그가 가톨릭 사회 복지 분과 위원회 산하의 ‘나눔의 집’에서 근무한 것도, 97년 ‘이것이 인생이다’와 그 후에 1.2번 다른 방송에 출연 한 것도, 또 ‘대한민국 서각 대전’에 그의 작품들을 출품 할 수 있게 후원해 준 것도, 99년 9월의 결혼도, 여기까지는 가톨릭의 의도에 별 마찰 없이 순응하며 지냈다. 그가 강원도 영월의 초등학교를 임대하고서부터 가톨릭과 큰 마찰이 일어났다.
최영철이 초등학교의 임대권을 받게 된 경위에도 가톨릭의 후원이 컸다.
가톨릭에서는 최영철 개인보다 최영철 뒤에 있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생각했기에, 초등학교를 임대한 다음의 계획까지도 가톨릭 쪽의 의견에 따르기를 바랐었다.
앞에서 한 말과 중복되는 부분이지만 이 부분에서 나와 가톨릭이 달랐다.
13.
내가 최영철을 사귀기 시작한 것은 93년이고 직접만난 것은 97년, 우리나라 나이로 34과 38살 때였다. 내 글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어린나이에 선택한 자살이후, 내가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끔찍했다. 글이나 책에서는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의 삶은 훨씬 더 힘들었다. 또 앞으로도 힘들게 버텨야만 한다.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다 보니 최영철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낸 이후 3-4번째부터는 칼날 같이 날카로운 말(글)을 해 댔다.
그곳 사정이야 어떻든 그에게 온 편지 내용이 ‘감사, 기도, 주님의 뜻, 겸손, 성경,.....’ 진짜 목사 같고, 신학생 같은 소리만 해서 오히려 내가 짜증내며 “창세기부터 계시록의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 까지 서각으로 새겨 봐라. 그렇다고 형제님의 삶이 바꿔지나! 남은 인생에 대해 의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며, 현실을 인정하고 주시하라...” 이런 내용의 답장까지 보낸 적이 있다.
나도 내 삶에 힘들어하며 ‘삶의 의미’, ‘생일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노력하고 살아왔다. 그의 생일날 내 이런 생각을 길게 서술 할 필요도 없이, 생일부케를 만들어 소포로 부쳤다.
난 최영철이 나머지 인생을 남들처럼, 사람답게(?) 살기를 바랐다. 사람답게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지난 과거에 대한 보상이라고 그에게 편지로, 말로,...
2005년 현재도 하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은 달랐다. 최영철 개인보다는 최영철 뒤에 있는 사람들(?) 이해를 돕기 위해 가·톨·릭·사·회·복·지·분·과·위·원·회(가톨릭교정사목위원회) 라는 말을 천천히 그리고 여러 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면 내가 하는 말들에 대해 조금은 느낌이 올 것이다.
적어도 가톨릭 사회복지 분과 위원회에서 사회전반에 걸쳐 out?side의 인생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재사회화’교육을 위한 몇 사람의 모델들이 필요하다면, 최영철은 너무 많은 조건을 갖춘 인물이었다.
14.
최영철이 98년 가톨릭 사회 복지 분과 위원회의 주선으로 신월동 나눔의 집에 근무하면서 서각 작업을 시작했다. 미리부터 나에게 말한 대로 12폭 병풍을 만들어 그 해 대한민국 서 각 대전에 출품해서 ‘입상’과 함께 ‘그 해의 문제작’으로 꼽혔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나도 세종문화회관 전시실까지 가서 그가 만든 병풍 앞에서 폼 잡고 사진을 찍으며 대견하게 생각했었다..... 위에 올려놓은 사진이다.

15.
.....최영철은 나한테만 밀어 놓으면 자기 카드 빚이 저절로 해결 되는 줄 알고, 2000년 5월에 삼성카드 강서채권팀에 연체보증 서 준 빚 1390만원 중에 1200만원 이상의 원금과 카드이자에 이자,...그것도 연체이자로 계산 된 터무니없이 비싼.... 그 와중에도 아들 분유 값이 없다는 눈물어린 사정에 2001년 1월인가2월인가에 LG카드 90만원 막아주고 ,....그 액수를 떠넘긴 것만도 모자라서 2003년 6월부터 그의 부인이 임신해 배부른 몸으로 사정사정하면서 하는 부탁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들어주었다가 2003년 가을에 400만원 또 당하고,...나 역시 돈이 없어서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빌려준 돈이었다....카드원금과 비싼 이자에 이자....
그러면서도 엎치락뒤치락 희한한 인간관계는 유지하고 있었다.
16.
최영철이 2005년 3월 30일부터 4월 5일까지 명동성당 내의 가톨릭회관 1층 ‘평화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졌었다. 그때는 교회의 피아노도 팔고 책도 팔아서 이사비용과 홈페이지를 업 시키는 비용을 마련할 때인데, 이때도 나에게 1주일간의 화랑 임대료 150만원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며칠 내로 보내 줄 테니 40만원만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곳에서도 화랑 임대료 150만원 중에 40만원이 모자라서 ‘물건으로 잡아 논다.’는 그의 절박한 부탁을 듣고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 역시 교회피아노까지 팔아야 될 지경이라면서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약속은 또 무산되었다.
17.
2005년 3월 30일부터 4월 5일 전시회 때도 시인 이 **수녀의 와서 방명록에 ‘희망의 사람’이라는 시와, 문화 평론가 정**신부의 격려의 글...
다 좋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 곳은 그 유명한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평화화랑, 가톨릭신문,...소위 ‘믿음, 신앙, 종교 , 인간...’단어들이 제일 많이 거론되는 곳이었다.
보통 큰 교회의 교인이나 성당의 신자가 이 정도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갖는다면 150만원어치의 물건들을 처분하는 데 1일도 안 걸린다. 하지만, 최영철이 1주일을 전시해도 기껏 화랑 임대료 150만원어치도 팔지 못했다.
이 정도로 힘든 상황이 그가 부딪친 인생여건이고, 내가 그를 도와주는 ‘이유의 전부’이다.
전시회를 끝내고 6일 오후 나에게 왔을 때는 온 식구가 2끼를 굶은 채 내려 온 상태였다.
가톨릭, 사회 복지 분과 위원회, 교목 위원회, 목사 몇 명, 장로, 연극인 ** ....그의 특수한 입지조건 덕분에 몇 번 TV에서 조명을 비춰 준 적이 있었는데, 그와 친한척하거나 그의 이름을 거론 될 때 뒷배경으로 나오는 단체나 이름이고....나는 ‘숨겨진 사람’ 역활...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의 뒤처리를 해 주는 사람은 성당도 아니고 신부도 아니고 수녀도 아니고 유명목사도 장로도 아니고....목사치고 너무 힘들고 황당하게 사는 내가 또 해주었다.
나도 다른 종교인들이나 유명 사회인사들 처럼 말이나 글만 가지고 온갖 생색 다 내가면서 좋은 사람, 훌륭한 종교인, 목사,.... ‘난 척 하는 인물 역할’ 좀 해 보고 싶다.
내 몸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 왔지만 결과는 지금은 내 존재는 내가 도와 준 사람들한테 오히려 짓밟히고 물어 뜨긴 흔적으로 홧병만 간직한 채로 살아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숨겨진 존재’로만 남아있기도 더 이상은 싫다.
그와 인간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2005년 8월부터는 단절한 상태이다.
....
내가 홈페이지와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은 내 인생을 토해내는 글들이다.
어쩌다 한두 번 읽어서는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많은 글이고, 오늘 올리는 글도 긴 분량의 글을 짧게(?) 편집한 글이라 내용이 매끄럽지 못하다. 내 홈페이지 www.mryoum.com은 지겹도록 희한한 내 자신의 전부를 죽기 전에 넓은세상에 내 보이려고 만들었다.
http://ministeryoum.blogspot.com/....나만의 공간으로 잠깐 초대.....